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가 ‘세종시 수정안’을 언급한 것을 계기로 세종시 문제가 정치권의 핵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정운찬발 세종시 논란이 여야간 주도권 다툼을 넘어 충청권 민심을 뒤흔드는 화약고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야권에서는 정 후보자의 발언이 청와대와의 사전교감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파문은 확산일로로 치닫고 있다.
세종시 논란이 확산되자 여야 정치권은 충청 민심과 여론 추이를 살피면서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을 정국 최대 이슈로 부상한 세종시 건설을 둘러싼 핵심 쟁점 및 찬반 논란을 들여다 봤다.
정 후보자의 발언으로 촉발된 세종시 논란이 거세지자 여야는 서둘러 제각기 입장표명에 나섰다. 한나라당은 충청권 표심을 의식해서인지 안상수 원내대표가 직접 나서서 세종시 특별법을 원안대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당 안팎의 반발 기류가 강해 세종시 문제가 자칫 내홍으로 치달을 조짐마저 일고 있다.
당내 반대론자들은 “청와대가 수정안을 준비 중이다”(차명진 의원), “세종시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정두언 의원), “세종시는 ‘노무현 말뚝’ 중 제일 잘못된 말뚝이다”(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특히 차명진 의원 등 현역 의원 44명은 세종시법에 반하는 ‘수도권 규제완화 법안’을 제출한 상태이며, 한나라당의 지지단체인 뉴라이트 계열의 보수단체들도 ‘노무현 정권의 말뚝’이라고 폄훼하면서 세종시법 자체를 원천적으로 재검토·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서울시와 경기도도 합세해 여권과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당의 사활을 걸고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하는 데 총력전을 펴고 있다. 특히 충청권에 기반을 둔 자유선진당은 정 후보자의 발언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정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등 그야말로 올인 승부를 펼치고 있다.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이 세종시 문제로 피말리는 혈투를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세종시는 이미 5조 원이 넘는 사업비가 투입된 현재 진행형 사업인데다 충청권 민심과 직결돼 있어 해당 지역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린 건국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의 쟁점은 결국 세종시법이 원안대로 유지될 것인가, 아니면 궤도수정될 것인가로 압축되고 있다.
충청권과 여야 정치권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세종시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한 것은 2002년 대선 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9월 30일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행정도시 이전’ 공약을 발표하면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고 낙후된 지역경제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게 공약의 골자였다. 참여정부 출범 후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 따라 2003년 신행정도시건설추진기획단을 출범시키고 이듬해 8월 충남 연기·공주 지역을 최종 후보지로 확정했다. 연기·공주 일대를 중앙행정, 문화, 국제교류, 도시행정, 대학연구, 의료복지, 첨단지식기반 등 6개 주요 도시로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해 총 예산 22조 5000억 원을 투입해 2030년까지 마무리한다는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다.
하지만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얼마 못가 암초에 부딪쳤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급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헌재는 당시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 헌법개정이 이뤄져야 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라 당시 정부는 대책마련에 들어갔고, 국회도 특위를 구성해 연기·공주지역을 활용하는 자족도시 건설 등의 대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2004년 11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결정에 따른 후속 대책위원회’가 출범했고, 2005년 3월 여야의 줄다리기 끝에 12부4처2청만 옮기는 것을 골자로 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후 세종시 사업은 속도를 내며 2007년 7월 기공식을 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신행정수도 추진→신행정수도특별법 제정→헌법소원→위헌→행정도시 특별법 제정→헌법소원→각하 등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온 세종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또다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세종시 수정 추진” 발언한 것과 관련 국회 본청앞 계단에서 자유선진당 의원들과 충청지역 주민들이 세종시 원안사수 1000만명 서명운동 출범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수많은 논란속에 사업이 장기간 표류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문제점도 속출하고 있다.
당시 1조 1000억 원이었던 내년도 예산이 절반 수준으로 감경됐고, 세종시에 아파트를 지으려고 땅을 분양받은 건설회사들이 사업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중도금 등을 제때 납부하지 않아 잇달아 계약해지를 통보받고 있다. 또 이주 인구를 예상하고 세종시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들 대부분이 미분양으로 남아있거나 미분양을 우려해 건설사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세종시 축소·변질 움직임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행정도시 예정지역 주민들이 예정지 토지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는 집단 소송과 현지공사 방해 등 극단적인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종시 문제의 핵심은 세종시가 과연 명품자족도시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여부다. 우선 당초 목표대로 인구 50만 명을 이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7000세대 규모의 첫 마을 공사를 시작으로 2011년까지 1만 5000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지만 정작 행정기관 이전은 2012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아파트는 있지만 입주자는 없는 유령도시로 장기간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입주대상 부처 공무원 수는 1만 명 정도로 가족과 인근 상권에 근무할 사람들이 모두 이주한다해도 5만 명 선에 그칠 것이란 어두운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각각 서울과 세종시에 기거할 경우 행정부가 분산돼 비효율적이고 국가 위기관리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세종시의 자족기능을 보완할 확실한 방법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유령도시로 전락함과 동시에 국가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비관론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세종시는 애초 정치 논리의 산물이였기에 추후에도 정치권의 이해득실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위험성도 안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여당 일각에서는 세종시로 이전할 정부 부처의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기업과 대학의 이전을 추진하는 방안과 국내 10대 그룹 중 한 개 본사와 교육과학기술부를 포함한 1~2개 부처를 옮기고 서울대 공과대학을 이전시켜 과학교육도시로 특성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기능을 특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자족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세종시가 자족기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인 사업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세종시 찬성론자들은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방 균형발전 차원에서 세종시 사업은 원안대로 추진돼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사업중단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과 경제적 손실 등을 이유로 원안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국토균형개발 명목으로 시행된 세종시 사업이 정치권의 도구로 전락되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세종시 건설이 애초 순수한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관점에서 추진된 것이 아니라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을 쓴 ‘정치 플레이’ 아니냐는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냉정하게 따져볼 때 세종시 건설은 충청권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심을 염두에 둔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시발이었다는 것이다.
세종시 건설 프로젝트 자체가 과학적 검증조차 없이 이뤄진 노 전 대통령의 공약과 충청권의 반감을 피하려는 정치권의 얄팍한 계산으로 탄생한 것이라는 회의론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미 4분의 1의 사업비가 투입된 현 상황에서 원안추진이냐 궤도수정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여야 정치권이 솔로몬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