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성기노 취재2팀장, 박민정 기자, 서윤심 기자]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서울 강남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우연히 탈모에 대한 라디오의 사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흘려들었을 이야기였지만 탈모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러 가는 길에 하필 탈모인의 고충이 담긴 사연이 소개돼 취재진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결혼을 하고도 아내에게 탈모를 고백하지 못하는 남편의 안타까운 사연에 유난히 이마가 넓어 보이는 택시기사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동병상련이랄까. 일반인은 ‘설마 그렇게까지 고민하느냐’라고 말하기 쉽지만 한번이라도 탈모증상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마치 한 가족의 아픔처럼 깊게 공감한다.
취재진은 강남역의 한 장소에서 스티커와 보드판 등의 도구를 설치하고 곧바로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먼저 남성 300명을 상대로 ‘내가 대머리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시작부터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만났다. 평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 탈모인들이(아니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를) 현장조사 내용을 보며 싸늘한 반응으로 적대감을 보인 것이다. 취재진이 눈여겨보니 오가는 남성들 중 거의 절반이 탈모일 정도라 갈수록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대머리라고 놀리느냐” “의도가 뭐냐” “눈에 보이는데 뭘 물어보느냐”며 버럭 화를 내는가 하면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취재진은 그들의 싸늘한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쏟아내야 했다. 예상치도 못한 난관에 취재진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거듭된 사과에 겨우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강남역 일대에서 성인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탈모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모습.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그런데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30대 초반부터 탈모가 시작됐다는 한 직장인은 “치료도 돈이 있어야 한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데 안 겪어본 사람은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그 고통을 모른다. 40살이 되면 그냥 포기하고 가발을 쓰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30대 남성은 “약 먹으면 성기능장애가 와서 싫다”며 삭발에 한 표를 던졌고 특히 20대들은 탈모는 불치병이라는 이유로 “차라리 죽겠다” “해외로 떠나겠다” 등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탈모인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취재진이 조사를 진행하기 전 ‘삭발한다’는 의견은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삭발이 반항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기 때문에 삭발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요즘은 삭발이 하나의 패션이 되면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든 게 사실이다. 40대 남성들도 삭발을 크게 꺼리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어차피 빠질 머리라면 멋있게 미는 게 낫다”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가리느니 당당하게 미는 게 보기 좋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 등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냥 둔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도 그것을 실천 중인 경우가 많았다. 반짝이는 머리를 연신 손으로 쓸어 넘기며 진지하게 조사에 참여한 한 노신사는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나도 벌써 20년째 대머리 인생”이라며 당당히 탈모를 밝혔다. 그밖에 “별짓 다 해도 결국은 대머리” “남세스럽게 무슨 가발이냐” “결혼만 하면 상관없다” 등의 이유로 탈모와의 전쟁을 포기했다.
탈모인들은 가발보다 적극적인 치료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조사 결과 ‘가발을 쓴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가장 적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가밍아웃’(가발을 쓴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린다는 뜻의 신조어)으로 취재진을 놀라게 한 40대 남성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다들 숨기고 있어서 그렇지 내가 봐도 가발 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거짓답변이 많다. 당당하게 삭발하거나 치료를 한다지만 실제 당해 보면 가발을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왜 가발 썼다고 말을 못하나. 주변 눈치 신경 쓰며 스트레스 받으면 머리카락 더 빠진다.”
남성에 이어 여성 300명에게는 ‘내 남자친구가 탈모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기혼자들도 남편이 아닌 남자친구라는 가정 아래 참여했다. 조사에 참여한 여성들은 질문을 보자마자 “으하하하” 박장대소를 하거나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며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는데 연령불문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려야지 탈모인 상태로 함께 다니는 건 싫다”가 공통된 의견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가발에 대한 거부감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내 남자친구가 탈모라면 ‘가발을 권유한다’는 선택이 36.7%로 가장 많았다. 남성들은 가발선택을 가장 낮게 대답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동료들과 우르르 몰려와 여론조사에 참여한 20대 여성들은 “금전적인 부분이나 효과를 생각하면 가발이 제일 낫다” “요즘 가발도 잘 나와서 티도 안 난다” “주변에 가발 쓴 사람들 꽤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며 가발 옹호론을 펼쳤다.
뒤이어 ‘상관없다’(23.7%), ‘삭발 추천’(21.3%), 그리고 ‘헤어진다’는 의견도 18.3%나 있었다. 그런데 이 조사에도 여러 비밀이 숨겨져 있다. 먼저 ‘상관없다’를 택한 이들 대부분은 탈모인 남자친구를 경험해봤거나 현재 남편이 대머리인 여성이었다. 이들은 “사랑하면 탈모쯤은 눈감아줄 수 있다” “본인 죄도 아닌데 불쌍하다”며 탈모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험자 중에서도 탈모는 안 된다는 비관론자들도 일부 있었다. “당장은 상관이 없어도 결국은 헤어진다” “탈모로 스트레스 받는 남자친구를 보는 게 더 힘들다” “나중엔 탈모만 눈에 보인다” “남자로서 매력이 없다” “세상엔 남자는 많다” 등 이유도 다양했다. 개중에는 “헤어질 남자친구면 탈모라도 괜찮지만 결혼할 사람이면 싫다”는 이중 잣대를 가진 여성들도 있었다.
‘삭발 권유’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갖춰줘야 했다. 탈모보다는 삭발이 낫다는 것이지 무조건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들이 말하는 삭발 조건은 ‘두상이 예쁘고’ ‘얼굴이 잘생겨야’만 했다. 여러 조건을 내걸고 삭발을 택한 여성들에게 “만약에 머리를 밀었는데 어울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모두들 한 마음으로 답했다.
“헤어져야죠.”
참으로 잔인한 대답이지만 그래도 기회를 주는 게 어디인가. 조사에 참여한 18.3%의 여성들은 탈모를 알게 된 순간 주저 없이 이별을 택했다. 취재진에게 이 결과는 꽤 큰 충격이었다. “내 남자친구가 탈모일 리 없다”고 몸서리를 치며 자리를 뜨던 20대 여성부터 “세상에 남자는 많다. 왜 굳이 탈모를 택해야 하느냐”며 열을 올리던 30대 직장인까지 망설임이 없었다. 아내에게도 탈모를 고백하지 못하는 라디오 사연 속 남편의 고민이 절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특별취재팀
가밍아웃 을 아시나요? 잠자리서 흥분한 여친 손에 ‘훌렁’ (--;) 가발을 착용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언제 어디서 들통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라는 한결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그만큼 가발을 사수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절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사우나를 가도 머리는 감지 않고 나온다. 축구를 해도 헤딩슛은 금물이고 물놀이도 마음 편히 할 수 없는 게 ‘가발러’(가발을 착용하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탈모인생 15년 차라는 신 아무개 씨(37)는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가밍아웃을 하게 됐다. 신 씨는 “대학시절부터 탈모가 진행됐는데 졸업을 앞두고 어학연수 기회를 얻었다. 외국에는 날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가발을 쓰고 가면 아무도 내 탈모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미리 찍어둔 여권사진과 가발을 쓴 모습이 너무 달라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했다. 짧은 영어로 온갖 설명을 해도 말이 안 통해 결국 그 자리에서 가발을 벗어야만 했다. 그 순간 공항에 퍼진 썰렁한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신 씨는 외국에서 벌어진 일이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여행 중 부분가발을 쓰는 외국인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 친구는 여자친구와의 잠자리가 고민거리라고 했다. 알고 보니 전 여자친구가 흥분한 나머지 남자의 머리를 쥐어흔들었고 그 순간 가발이 벗겨졌다는 게 아닌가. 인터넷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가발이 벗겨질까 너무 몸을 사리다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남자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격렬한 운동의 부작용으로, 버둥거리며 떼쓰는 아이의 손길에 의해, 옷을 사기 위해 방문했던 백화점에서 등 ‘강제 가밍아웃’ 사례들도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술로 인한 가밍아웃이 가장 많았다. 맞춤가발전문 위캔두잇 조상현 대표(30)도 “가족들에게도 4년간 가발 착용을 숨겼다. 그런데 매형들과 술을 많이 마신 날 화장실에 가발을 벗어두고 나와 들통이 나버렸다. 누나들은 매형 중 누군가가 탈모를 숨기고 결혼한 줄 알고 ‘범인 색출’에 열을 올리고 난리가 났었다. 가발 안쪽에 적힌 내 이름을 발견하고는 소동이 끝났는데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고백했다. [박] |
‘훈남 가발제작자’ 조상현 위캔두잇 대표 인터뷰 ‘가밍아웃’ 후 매출 대박 사람들이 내 머리만 뚫어져라… 보고, 또 봤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의 머리를 흘끔거렸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의 ‘가밍아웃’ 장면을 TV에서 보지 못했더라면 정말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가발러’라는 사실을. 조상현 대표의 가발 착용 전후 모습. 구윤성 기자 분야가 특이하다보니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도 무궁무진했다. “다짜고짜 전화해 상담부터 하는 고객도 있다. 탈모가 언제 시작됐고, 그것 때문에 애인과 헤어졌고, 면접도 떨어졌고 등등. 통화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기도 한다. 바쁘지만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냥 전화를 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30대 남성이 타깃이기에 연애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조 대표도 24살 때부터 탈모로 고생했기에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고. 때문에 손님이 원하면 이력서용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누군가 가발을 만질 때 극도로 예민한 가발러들을 위한 배려다. “한 번은 손님의 아버지께서 찾아왔다. 탈모 때문에 집 밖에도 나가지 않던 아들이 친구들도 만나러 나가고, 애인도 생겼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보람 있는 사업이라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회사 운영 원칙에도 조 대표의 구구절절한 경험이 묻어났다. “밖에서부터 대문짝만하게 ‘◦◦가발’이라고 붙여놓으면 들어가기조차 민망하다. 상호에도 ‘가발’이라는 단어를 빼고, 밖에 간판도 달지 않았다”고 조 대표는 설명했다. 가발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가 직접 겪은 고민 때문이다. “아저씨 스타일의 가발밖에 없어서 ‘차라리 내가 만들자’고 결심했다. 수없이 연구하고, 본을 뜨고 소재를 정해 공장에 찾아가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이라 제작자들도 ‘왜 굳이 이런 새로운 방법으로 만드냐’고 되물을 정도였다”고 제작과정을 설명했다. 모든 가발이 인모로 제작되다 보니 수명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1.5년 정도가 평균수명이고, 관리를 잘하면 최장 3년까지 쓸 수 있다. 조 대표는 가발러들에게 전하는 팁으로 “가발은 새끼강아지처럼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세척은 조심히 결대로 쓸어가며 하고, 햇볕에 변색될 수 있으니 그늘에서 전용 틀에 놓고 말려야 한다. “요즘은 가발이 잘 나와 착용한 상태로 수영도 할 수 있다. 무조건 거부감을 갖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가발로 자신감을 찾는 것을 추천 한다”고 1000만 탈모인에게 조언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