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도 신년인사회에서 조석래 전경련 회장(효성그룹 회장·가운데)과 이명박 대통령이 건배를 하고 있다. | ||
특히 검찰은 효성그룹과 관련된 범죄 첩보를 광범위하게 입수하고 범죄 혐의가 있다는 ‘범죄 첩보보고서’까지 작성하고도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아 권력 차원의 외압 의혹도 불거지고 있는 실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사태를 불러온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민주당은 명백한 ‘부실·봐주기 수사’라며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어 거센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 효성그룹 오너 일가가 미국에 수십억 원대의 부동산을 구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효성 비자금 논란은 ‘비자금 X파일’ 사건으로 확전될 조짐마저 일고 있다. ‘살아 있는 권력’과 연계된 가공할 만한 시한폭탄으로 부상하고 있는 효성그룹 ‘비자금 X파일’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효성그룹의 비자금 의혹 사건이 처음 불거진 것은 3년여 전이다. 검찰은 2006년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부터 효성그룹과 관련된 석연치 않은 자금 흐름 내역을 입수하고 내사에 돌입했다. 효성이 해외법인과의 위장거래 등을 통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잡고 은밀히 수사에 나선 것이다.
당시 검찰이 확보한 자료에는 효성이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인 캐피탈월드리미티드(CWL)가 보유하고 있던 ㈜효성 주식의 변동 내역을 7년 동안 공시하지 않은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또 홍콩 법인인 CWL이 수백억 원대의 ㈜효성 주식을 매각한 뒤 현금화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10월 13일 금융감독원 공시자료에 따르면 CWL은 50% 지분을 갖고 있던 효성생활산업이 1998년 11월 ㈜효성에 합병되자 합병회사 주식 211만 주(10%)를 받았다. 회사 합병으로 CWL은 단숨에 상장기업인 ㈜효성의 3대 주주가 됐다. CWL은 이후 99년 ㈜효성의 유상증자 참여와 주식배당을 통해 2004년 3월까지 ㈜효성 보유지분을 328만 9000주로 대폭 늘렸다.
하지만 효성은 대주주의 이 같은 지분변동 내역을 7년 동안 공시하지 않은 채 숨겨온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 증권거래법상 상장기업 주요 주주의 경우 지분 변동이 발생할 경우 10일 안에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효성 측은 2005년 5월 뒤늦게 ‘착오로 인한 누락’이었다며 지난 7년간의 지분 변동내역을 한꺼번에 신고했다. CWL은 공시 후 보름 만에 갖고 있던 ㈜효성 주식을 집중 매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CWL은 2005년 5~10월 사이 6개월 동안 모두 220만 3473주를 매각해 현금 280억 원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10월 13일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대검 ‘범죄 첩보보고서’ 일부 내용에도 CWL의 석연찮은 주식 매각 흐름이 적시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CWL이 2000년 해외금융사로부터 5000만 달러를 빌렸고, 효성이 중개무역을 가장한 지급보증으로 CWL의 빚 일부를 갚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나머지는 2005년 CWL이 보유하고 있던 ㈜효성 주식을 팔아 갚은 것으로 적시돼 있다. 보고서는 “범죄 관련 의혹 제기가 공개적으로 지속되고 있고 혐의 인정의 개연성이 농후하므로 적극적인 수사로 국민들의 수사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해야 한다”며 효성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한 적극적인 수사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복수의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검찰은 2007년 말에서 2008년 초에 효성그룹과 관련된 범죄첩보 10여 가지를 정리해 문서로 작성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보고서에는 효성그룹이 효성아메리카, 효성홍콩, 효성싱가포르 등 국외 법인과 거래하면서 제품 단가를 부풀리는 방식 등으로 비자금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외 법인이 거래처에서 받아야 할 부실채권 액수를 부풀리거나 환어음 수수료 부당 지급 등을 통해 국외로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핵심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 보고서에 나온 내용과 관련해 효성그룹 오너 일가나 관계자를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았다.
▲ 조현준 사장이 2006년 매입했다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소재 호화리조트. | ||
CWL의 실체 및 수상한 주식 거래 의혹에 대해서는 아예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고, 권익위의 제보 내용과 관련해서는 효성중공업의 일부 임원이 수입 단가를 200억~300억 원 부풀려 한국전력에 사기 납품했다는 요지의 개인 비리 사건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검찰 수사 초점도 효성그룹의 한 계열인 효성 건설부문에만 맞춰졌고, 확인된 비자금은 건설부문이 국내에서 조성한 70억여 원이 전부였다. 효성그룹과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 및 해외 법인을 통한 재산 해외유출 의혹 등에 대해서는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검찰이 지난 4월 효성 비자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조석래 회장을 소환조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부실·봐주기 수사’ 논란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검찰의 효성그룹 비자금 수사를 파악하기 위해 10월 15일 서울중앙지검을 방문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검찰이 효성 수사 과정에서 4월께 조 회장을 소환조사했다고 설명했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어떤 자격으로 얼마동안 조사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의원과 함께 검찰을 방문한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검찰이 조 회장 등 효성 임직원 32명을 포함해 126명을 소환조사했고 4번에 걸쳐 45명의 계좌를 추적했다고 하지만 압수수색을 실시하지 않은 것은 수사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효성 측이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충실히 제출해 압수수색의 필요성이 없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 관계자들은 효성이 MB의 사돈 기업인 만큼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봐주기 수사를 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서슬퍼런 ‘살아있는 권력’ 앞에 검찰이 아예 칼을 꺼내들 엄두조차 못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정권 차원의 ‘외압’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효성 수사와 관련한 봐주기·외압 논란은 조석래 회장의 막내 동서인 주관엽 씨가 실소유주인 로우테크놀로지(로우테크)의 군장비 납품 비리 사건 과정에서도 불거진 바 있다. 검찰은 지난 4월 로우테크가 군장비 납품 과정에서 허위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수법으로 64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신 아무개 씨 등을 기소하는 대신 주 씨는 기소중지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했다. 지난해 5월 서울경찰청 특수수사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지 1년 만에 경찰이 수사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한 셈이다.
효성그룹 동양나이론 방위사업부에서 분리된 로우테크는 효성 임직원 출신 인사들이 대표를 돌아가며 맡고 있고, 조 회장의 동서인 주 씨가 실질적인 소유주라는 점에서 효성가와 밀접한 관계사로 분류되고 있다. 실제로 로우테크가 납품한 야간표적지시기 특허권은 주 씨와 아내 송 아무개 씨(조 회장의 막내 처제), 조 회장의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이 공동으로 갖고 있다. 방산업계 일각에서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국방부 비용으로 로우테크가 개발한 다중통합레이저훈련체계(MILES) 장비사업의 특허권 등이 조 사장 등 효성그룹 일가에게 전부 넘어간 사실에 비춰볼 때 사건의 배후에 효성그룹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당연히 군사장비 특허권 이전 문제 등을 결부시켜 효성그룹 일가까지 수사를 확대했어야 했지만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다. 또 주 씨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소중지 처분을 내려 부실·봐주기 수사 논란을 부추겼다.
효성그룹과 관련된 각종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가운데 조현준 사장이 2002년 미국 LA에서 450만 달러(당시 환율 56억 원)짜리 고급 호화 빌라를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효성 일가의 미국 부동산 거래 실태도 새로운 뇌관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효성그룹에 대한 검찰의 부실·봐주기 수사 논란을 넘어 외화 해외밀반출 의혹 등 효성그룹 일가의 ‘비자금 X파일’ 문제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효성 일가의 미국 부동산 거래와 관련해 ‘단서가 있으면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상태다.
‘죽은 권력’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는, 그야말로 거침없는 사정 칼날을 휘둘렀던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과 연계된 효성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지 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