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난아이가 신종플루 검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엄마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사회를 예측불허의 상태로 만드는 신종플루는 반갑지 않다. 그런데 그런 신종플루가 할 말이 있단다. 대국민 사과를 먼저 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 신종플루입니다. 먼저 저로 인해 깊은 슬픔과 쓰라린 고통을 겪고 계신 많은 분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또한 제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파급력 때문에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의료 관계자 여러분, 정부 당국자 여러분, 노고가 많으십니다.
물론 저, 신종플루를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얘기도 좀 들어봐 주십시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들 그러고 싶어서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겠습니까.
오늘까지(11월 12일 기준) 모두 64명이 저로 인해 목숨을 잃으셨더군요. 비고위험군도 11명이나 된다 하죠…. 게다가 요즘은 타미플루를 먹어도 사망을 하거나 증상이 나타난 후 이틀 만에 사망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어, 참 걱정입니다. 제가 저지른 일이라 나서지도 못하겠고…. 저도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저에 대해 너무 막연한 공포를 가지는 건 저도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저, 그런 놈 아닙니다. 닥치는 대로 다 쓸어버리는, 그런 무식한 깡패는 아닙니다. 저, 그래도 ‘경우 있는’ 바이러스입니다.
설마 제가 ‘경우 있다’고 했다고 ‘루저녀’처럼 ‘경우남 혹은 경우녀’로 부르면서 주옥같은 패러디를 양산하지는 않겠지요? 저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저로 인해 피해를 보는 분들이 있지만, 반면에 대박을 맞은 분도 계십니다. 누구냐구요?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죠. 일단 병원, 그리고 마스크, 소독제, 체온계 제조업체는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한 마스크 제조업체는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200% 이상 증가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 면역력 높이는 제품은 없어서 못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대박은 타미플루 제조업체와 개발사입니다. 현재 절 막을 자는 타미플루가 유일합니다. 물론 앞으로 나와 대적하겠다는 놈들이 더 나오겠지만 임상 실험이다 뭐다 다 하려면 아직 먼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스위스의 제조업체와 미국의 개발사는 달러, 유로화와 가리지 않고 돈다발을 쓸어 담고 있을 겁니다. 그 회사 주식 좀 있지 않냐구요? 아휴, 저 주식 손 끊은 지 오래입니다. 그 업체들에서 연말에 공로상이나 하나 줬으면 하는데…. 뭐 아직 공식적으로 소식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대박을 치면, 쪽박을 차는 곳도 있기 마련입니다. 저로 인해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죠. 대표적인 곳들이 학원, 여행사, 이벤트 회사들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분기 교육서비스업의 국내총생산(GDP)이 동기대비 0.1% 줄었다고 합니다. 외환 위기 이후 10년 6개월 만에 처음이라네요. 그 어떤 정부도 줄이지 못했던 사교육을 제가 줄인 셈입니다.
그리고 인산인해였을 전국의 지자체의 가을 축제는 모두 파리가 날렸죠. 아예 취소한 행사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 분들한테도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에 한국은행장이신 분이 “빠른 속도로 올 겨울 내내 지속될 경우 우리 경제에 상당히 의미있는 충격이 될 수 있다”고 했다죠. 사람이 많이 모여야 돈을 쓰고 벌고 하는데, 당최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니, 경제에 타격이 갈 수밖에요. 하지만 사람이 모이지 않아도 되는 장사는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이 대표적이죠. 이 분들이 역시 연말에 저한테 보너스 좀 찔러주지 않을까요?
최근엔 안과에도 사람이 많이 줄었다죠. 병원에 사람이 없다는 건, 아픈 사람이 별로 없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사람들이 제가 무서워 손을 깨끗이 씻는 등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다 보니 각·결막염이 1/3로 줄었답니다. 원래 안과는 휴가철이면 각막염과 결막염 환자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올해는 한산합니다. 이 병은 가을이 깊어지면서 없어지는지라 올해는 눈병 고생 덜하게 생겼습니다. 그밖에도 식중독도 줄어들고 있고, 수족구병, A형 간염도 덩달아 줄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언론이 미워집니다. ‘신종플루 사망자 00명’이라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면서, 이런 제 ‘공로’는 단신으로 처리하니까 말입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떤 것을 더 집중적으로 확대해서 보도하느냐에 따라, 영웅이 될 수 있고, 역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요즘 야당과 시민단체에서 언론이 공정성을 잃었다고 한다는데,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가네요.
그리고 말이야, 에구, 제가 흥분해서 반말이 튀어나왔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요즘 뉴스가 저, 신종플루밖에 없답니까. 4대강이다, 효성이다, 비자금 의혹받는 국회의원이다, 얼마나 좋은 뉴스가 많은데, 그런 건 보도 안하고, 저의 나쁜 점들만 확대 보도하는 겁니까. 국민들이 관심이 온통 저한테 쏠려 있으니까 그렇다는 거,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밸런스를 맞춰야하는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계속 이런 ‘편파보도’를 일삼을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할 것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언론의 그런 행태 때문에 정작 국민들이 저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는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뭐 이런 거 말입니다.
▲ 학생들의 체온을 재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 | ||
사실 전 패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 딸이 있냐구요? 그 가족 말고, 브라더들만 있는 패밀리 말입니다. 말하자면 전 이제 막 패밀리에 들어온 신입 브라더라고 할 수 있죠. 패밀리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돼지 인플루엔자’라고 불렸습니다. 제가 먹성이 좋고 힘 좀 썼던 점도 있었지만, 과학적으로는 돼지를 개체로 한 바이러스라서 그렇게 불렸던 겁니다. 하지만 나중엔 돼지와 관련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돼지 사육업자들이 들고 일어나 이름을 바꾸라고 데모를 했습니다. 결국 신종플루라는 현재의 닉네임을 가지게 되었죠. 하지만 사실 신종플루라는 이름은 좀 그렇습니다. 제 아래 기수 놈들이 오면, 걔네들이 신종플루거든요. 뭐 나중에 좋은 이름 하나 주겠지요.
정확한 호적상의 이름은 ‘인플루엔자 A(H1N1)’입니다. 우리 인플루엔자는 A형, B형, C형이 있는데 B형은 국지적으로 유행하고, C형은 감기 증상과 비슷한 정도의 병증만 나타냅니다. 대유행을 일으키는 건 바로 우리 A형들이죠. 그러니 우리가 강호를 주름잡는 거 아니겠습니까. H1N1은 A형 인플루엔자의 종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플루엔자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러니 A형이든 B형이든, 모두 한 가족인 셈입니다.
그런데 감기는 우리 패밀리가 아닙니다. 걔네들은 말이죠, 길거리에서 침이나 뱉는 양아치들입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입니다. 가끔 감기와 독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인플루엔자들은 굉장히 모욕적으로 느낍니다. 영어로도 감기는 ‘Common Cold’로 ‘Iinfluenza’와는 전혀 다르게 구분됩니다.
제 패밀리는 스페인 독감,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조류 독감 등이 있습니다. 다 우리 형님들이죠. 이 중에서 최고는 단연 스페인 독감입니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에 유럽을 휩쓸었던 독감입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감염되어 2000만~5000만 명이 우리 형님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져,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한국에서도 740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를 한국에서는 ‘무오 독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스페인 독감은 전세계적으로 7000만 명~1억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는 타미플루 같은 약은 물론 백신도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어 감염자나 사망자 수의 집계가 부정확했다고 합니다. 하여간에 우리 스페인 독감 형님의 위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유럽에서 사망자수가 1차대전의 두 배였다니, 그야말로 ‘레전드’였죠.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스페인 독감 형님은 H1N1 바이러스입니다. 저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스페인 독감의 직계인 셈이죠. 저로선 대단한 영광입니다만….
우리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수시로 교잡과 변이를 거쳐 언제나 새로운 놈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바이러스가 나올지는 며느리는 물론 시어머니도 모를 일입니다. 어떤 무시무시한 대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불허라는 건 굉장한 공포를 만들어냅니다. 예측불허한 경제상황이 주식시장을 무너뜨리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공포는 음모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바이러스에 관한 음모론을 소재로 한 영화도 여럿 있었습니다. 저에 대한 음모론 중 가장 신빙성이 떨어지는 건 ‘외계인이 퍼트렸다’라는 겁니다.
요즘 인기 있는 음모론은 ‘누군가 고의로 퍼트렸다’는 주장입니다. 이 음모론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바로 타미플루를 개발한 미국의 회사의 대주주가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인데, 이 회사가 스위스의 제조회사와 함께 고의로 저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는 얘기입니다. 뭐, 개발사와 제조사, 그리고 럼스펠드 전 장관이 돈 벼락을 맞은 건 사실이지만, 글쎄 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그럴듯한가요?
여러분들의 관심사는 과연 ‘저놈의 신종플루 인기가 언제까지 갈까’일 것입니다. 사실 그 점에 대해 확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가 “백신접종이 마무리되면 조금씩 누그러들지 않겠냐”하고 있고 의사들도 “원래 인플루엔자는 전 국민의 30% 정도가 감염될 때쯤이면 점차 힘을 잃는다”라고 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네요.
하지만 우리 바이러스는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구종플루’가 될 수도 있고 저보다 더한 놈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바이러스 세계는 언제 어떤 놈이 나와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요. 저 역시 얼마 안 있어 ‘전설’로 남게 되겠지요. 당장 올해의 뉴스메이커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지 않을까요.
요샌 기침 좀 하고 열 좀 있으면 직장 상사가 얼른 가서 일주일 쉬고 오라고 한다죠. 신종플루에는 타미플루 외에도 충분한 휴식과 수분 섭취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외람되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여러분 바쁘게 살지 않았습니까. 얼마 전 5주 연속 야근하다 사망한 분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 모두 그렇게 피곤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기회에 좀 쉬세요. 학생들도 쉬고, 직장인들도 연말에 수많은 술자리, 행사에서 좀 벗어나고…. ‘내가 나를 모르지만’ 어쩌면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여기에 온 건 아닐까 싶습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온 건 아닐까, 저를 그리 생각해 주시면 저로 인한 추가 피해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저로 인해 숨진 분들과 가족 분들에게 진심어린 사죄와 애도를 전해 드립니다. 노약자, 어린이 분들, 또 건강하신 분들도 잘 이겨내시고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또 다른 신종플루도 잘 맞서시길 바랍니다.
유인홍 자유기고가 shirave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