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구 국세청 국장(왼쪽)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 | ||
그동안 국세청은 신성해운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사건, 한상률 전 청장이 연관된 의혹을 받고 있는 그림로비 사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의 단초를 제공한 태광실업 세무조사 등 ‘국세청발’ 대형사건으로 몇 차례 홍역을 치른바 있다.
국세청은 검찰, 경찰, 국정원, 감사원 등과 함께 5대 권력기관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국세청은 업무 특성상 다른 권력기관보다 유난히 불미스런 사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구린내가 끊이질 않는 국세청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국세청장의 정부 내 직급은 차관급이지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나 영향력 등은 오히려 장관급 이상이다. 특히 기업들에게 국세청장은 ‘저승사자’나 다름 없다. 막강한 권한을 지닌 만큼 국세청장이 되기 위해 보이지 않은 다툼도 치열하게 벌어진다. 국세청에서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일의 상당수도 결국 국세청장 등 고위급 인사를 둘러싼 일련의 암투 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다.
최근 국세청장 임명 과정을 보면 국세청 내에서 보이지 않게 전개되고 있는 암투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그림로비’ 사건으로 낙마한 이후 후임 청장으로 크게 3명 정도가 유력 후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한 명은 외부인사였고 나머지 두 명은 내부인사였다.
특히 내부인사 두 명은 청장 자리를 놓고 갈등을 넘어 전쟁을 방불케하는 암투를 벌였다는 소문이 설득력 있게 나돌기도 했다. 한 사람은 ‘정보라인’, 다른 한 사람은 ‘감찰라인’을 쥐고 상호 견제와 경쟁구도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청장 인선이 다가오자 ‘정보 라인 쪽의 직원들이 외부에서 국세청 내부 얘기를 흘린다’ ‘감찰의 한 인사가 모 기업으로부터 스폰을 받고 있다’는 등의 루머가 국세청 외부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청와대에도 관련 투서들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마치 한 사람이 청장이 되면 밀려난 다른 한 사람 쪽의 인사들은 전부 옷을 벗어야 할 것 같은 공포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만큼 내부 갈등이 심각한 것처럼 외부에 비쳐졌다. 외부에 비친 것이 이 정도였다면 실제 내부에서는 더욱 심각한 ‘암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백용호’라는 전혀 의외의 카드를 뽑아들었고, 갈등설은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참여정부 시절에 임명돼 정권 교체를 맞았던 한상률 전 청장 입장에서는 내부 인사와의 다툼보다는 정권의 ‘재신임’을 받아야 했다. 전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는 권력기관장에게 바뀐 정권에서 재신임을 받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정권 교체 이후 한 전 청장은 ‘정권 실세 ○○○ 등에게 줄을 섰다’는 식의 구설수가 끊임없이 그를 쫓아다녔다. 물론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가 정권교체 이후에도 1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왔다는 점에서 국세청 안팎에서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던 그도 결국 ‘그림로비’ 사건으로 낙마했다.
▲ 민주당 국세청 방문 11월 26일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왼쪽), 조배숙 의원 등이 국세청을 방문, 백용호 청장에게 ‘한상률 게이트’ 진상조사를 촉구했다.연합뉴스 | ||
안 국장은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주장하지만 국세청 내부에서는 안 국장의 권력욕이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가는 주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세청장 자리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안 국장과 같이 차기나 차차기 청장을 노리는 국세청내 고위층 사이에서는 또 다른 권력 투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각자가 붙잡은 ‘줄’을 수장으로 만들기 위해 후방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가야 할 다음 자리를 만드는 중요한 작업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번 파문도 TK(대구·경북) 적자를 둘러싼 안 국장과 또 다른 고위직 인사의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에서 비롯됐다는 게 국세청 내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국세청내 또 다른 TK 실세가 이번 안원구 국장 파문의 배후로 지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향후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한 전 청장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안 국장의 발언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어떤 면에서 한 전 청장은 이러한 역학 구도를 절묘하게 이용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최근 기자가 만난 전직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이런 파워게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이른바 ‘공작’이 일어난다”고 귀띔했다. 이 인사는 “국세청 내부에서 인사를 둘러싸고 공작을 할 만한 인사들이 몇몇 있으며 안원구 국장도 어쩌면 이런 공작의 희생양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국세청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도 이런 은밀한 작업의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일례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두 해 전 국세청의 아무개 고위 인사가 (일종의 공작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역정보를 정보시장에 돌린 바 있다. 바로 다음날 이 정보가 모든 ‘찌라시’ (사설 정보지)에 실리자 상당히 만족해했다. 만족감을 표시한 이 인사는 현재도 국세청 최고위층 인사의 측근으로 재직 중이다. 이 최고위층 인사는 현재 안원구 파문의 핵심 당사자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런 파워게임이 벌어지면 표적이 되는 인사와 관련한 비리 등이 소리소문 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최근 청장 후보에 올랐다 밀려난 한 인사는 청장 후보 리스트에 오르자마자 ‘전 정권 아무개 인사와 친분 관계가 있다’는 식의 루머가 돌기도 했다. 몇 해 전에는 아무개 인사가 차장이 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유력후보가 밀려났는데 당시 밀려난 인사가 모 기업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국세청 안팎에서 떠돌기도 했다.
국세청에서는 고위직에 오르는 동안 본청이나 서울청 조사국을 거치는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인식돼 있다. 이곳은 대부분 대기업 조사를 담당하는 곳인 만큼 구설수에 휘말릴 가능성도 높다. 구설수가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이런 내용이 국세청 내부에 돌거나 혹은 투서 형식으로 청와대 등 사정당국에 들어가면 대부분 옷을 벗거나 혹은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전직 국세청장 중 상당수가 과거 세무조사와 관련해 문제점이 드러나 옷을 벗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직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인사를 둘러싼 국세청 내부의 파워 게임이 멈주지 않는다면 이런 악순환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며 “국세청 비리 사슬이 끊이질 않을 경우 대통령은 이번 백용호 청장 케이스처럼 계속 외부 인사로 청장을 임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세청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국세청이 자주 구설수에 휘말리는 또 다른 이유로 청장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상률 전 청장 재임 시절 세무조사 대상 기업 중에 태광실업, 창신섬유, 정산개발, 제피로스 골프장, 시그너스 컨트리클럽, 심지어는 토속촌 삼계탕까지 전 정권과 연관이 있는 기업들은 모조리 세무조사를 해서 세금을 추징한 반면 현 정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모 일간지와 현 정권 실세로 불리는 기업인의 회사는 오히려 세무조사를 통해 일종의 면죄부를 줬다”며 “한 전 청장이 현 정권에서 유임된 것을 신호탄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세청의 각종 비리 연루 사건들은 결국 청장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