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규 전 국정원장. | ||
최근 한 탈북 망명자가 이 같은 주장을 펴면서 국정원 관계자들을 고소해 그 속사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건의 장본인은 3년여 전 한국에 망명한 전 아무개 씨. 전 씨가 한국에 온 것은 지난 2006년 3월경이다. 당시 전 씨의 망명 소식은 국내에서 큰 이목을 끌었다. 전 씨는 왜 국정원 때문에 자신들의 친족이 몰살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전 씨의 고소 내막과 그의 망명 과정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숨은 얘기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2006년 3월 14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한국 대사관에 신원미상의 인물 대여섯 명이 뛰어들었다. 북측의 추격을 따돌린 끝에 잠입에 성공했다는 이들은 대사관에 한국 망명을 요청했다. 06년 헝가리에서 탈북 망명을 해 주목을 끌었던 전 씨와 그 가족들의 망명 스토리는 언론에선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전 씨 일가족의 탈북 망명 사건은 국내에서 큰 이슈가 됐다. 망명할 당시 전 씨가 북한 고위직 인사에 속했다는 사실은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전 씨는 당시 북한 조선노동당 산하 북한국제투자개발회사의 헝가리 지사장으로, 동구권 주재 북한 외교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전 씨의 망명 소식은 <조선일보>가 처음 단독으로 보도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졌고 이후 타 언론사들이 가세해 경쟁적으로 보도를 하면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전 씨 일행이 망명을 단행한 이후에는 이들의 소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전 씨가 국내에서 성공적인 벤처기업가로 성장했다는 정도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이처럼 벤처기업가로 변신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던 전 씨가 최근 송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결과 전 씨는 지난 11월 말경 서울중앙지검에 ‘외교상 기밀누설’ 혐의 등으로 국정원 직원 등을 고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피고소인에는 김승규 전 국정원장을 비롯해 전 씨가 망명할 당시 이를 조율한 헝가리 파견 국정원 직원이었던 문 아무개 씨, 당시 망명 소식을 단독으로 보도했던 <조선일보> 기자, 망명 과정 전반을 담당했던 외교통상부 직원 등 다수가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전 씨가 이들을 고소한 이유는 한마디로 전 씨 일가족이 한국으로 망명할 당시에 국정원이 망명 소식을 공개하지 않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전 씨 측이 검찰에 주장한 바에 따르면 06년 당시 망명정황은 언론에 보도됐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르다. 전 씨는 06년 3월 14일경 한국 대사관이 아닌 헝가리 내무성을 찾았다. 이곳에서 전 씨는 헝가리 정보기관 관계자들에게 “미국으로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망명의사를 표명한 지 며칠이 지난 후에도 미국 측과 전혀 접촉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알고보니 북한 외교관인 전 씨의 망명 신청 정보를 입수한 국정원 측에서 헝가리 정보기관에 “전 씨의 미국행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전 씨는 이 때문에 헝가리 내무성에 억류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한국 정보기관의 개입으로 망명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 전 씨는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직면하게 됐다.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며 수일을 기다린 전 씨는 한국에서 파견된 국정원 직원 문 아무개 씨와 마주하게 된다.
당시 문 씨는 전 씨에게 “북한 당국이 위협해 오고 있는 현 시점에서 헝가리 정부에 오래 남아있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으로 망명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장 안전하고 신속한 방법은 한국행뿐이다”라며 미국 망명을 접고 한국으로 망명하라고 회유했다고 한다.
이에 절박했던 전 씨는 고민할 새도 없이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망명 정보가 조금이라도 새 나갈 경우 일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 씨가 국정원을 신뢰하면서 한국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정원 측이 이들 가족의 망명 정보를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2006년 당시 전 씨의 망명소식을 <조선일보>가 단독 보도하면서 해외언론에까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 ||
전 씨가 한국행을 국정원 측에 통보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전 씨 측에서는 당시 국내에 자신의 망명 소식이 전해진 것은 국정원 측에서 일부러 흘린 정보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 측 관계자는 “전 씨가 당시 정치적 이유를 거론하며 국정원이 고의로 자신의 망명 정보를 누설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전 씨는 검찰에서 자신의 망명 사실을 국정원이 대외선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의로 언론에 알려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전 씨는 왜 망명한 지 3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것을 문제삼는 것일까. 전 씨가 제출한 소장에 그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다. 그는 소장에서 “최근 망명 당시에 북한에 거주하고 있었던 일가족들이 모두 숙청된 것으로 파악됐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전 씨는 망명 후 2년여 동안은 국내에서 자리를 잡는 데 몰두하느라 북한에 남겨진 친지들에 대해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전 씨는 사업가로 자리를 잡은 이후 중국에 있는 지인들과 친족들을 통해 북한에 거주하는 친인척들의 근황을 백방으로 알아봤다. 그러던 와중에 전 씨는 얼마 전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전 씨의 한국행이 알려진 직후인 06년 4월경부터 북한 당국의 보복 작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친지들 중 일부는 강제노역장에 끌려갔고, 또 일부는 북한군들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전 씨와 관련된 친인척들 대부분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결국 전 씨는 “당시 국정원이 약속대로 자신의 망명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만 않았다면 친인척들이 이처럼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 국정원 최고인사와 자신의 망명을 도왔던 당사자들을 고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번 고소 사건은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또 김승규 전 국정원장을 비롯한 피고소인들에게 업무상 기밀 누설 혐의 등이 적용될 수 있을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약속 불이행 내지는 보안 소홀로 북한에 남겨진 친인척들이 모두 숙청당했다는 전 씨의 주장은 법적인 판단을 떠나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에서는 전 씨의 주장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국정원 공보실 측 관계자는 12월 4일 기자와 통화에서 “당원에서 전 씨의 귀순 여부를 언론에 유출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며 “전 씨가 김승규 전 국정원장을 고발하는 등 현재 우리 측에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고 반박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