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살된 A 씨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시사저널 | ||
그렇다면 이 노인이 남긴 막대한 유산은 어떻게 됐을까. 취재결과 유산은 당시 언론 보도와는 전혀 다르게 상속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4월 언론 지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재력가 피살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 및 그 이후를 쫓아가 봤다.
사건은 지난 2008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민준비 및 여행을 위해 딸과 함께 필리핀을 찾았던 60대 노인 박 아무개 씨(A 씨)는 마닐라 시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외딴 곳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A 씨의 남동생 두 명은 필리핀에 동행했던 딸 서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경찰서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두 남동생은 ‘누나가 죽기 얼마 전 누나의 유언장이 조카인 서 씨에게 유리하게 변경됐다’고 진정 이유를 밝혔다.
경찰은 서 씨와 A 씨의 동생 두 명을 출국금지시키고 수사를 했으나 뚜렷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답보에 빠졌던 사건은 한 달 뒤 청부살인을 암시하는 서 씨의 목소리가 담긴 CD가 필리핀 경찰로부터 전해지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된다. 서 씨가 고용했던 필리핀 운전기사가 제출했다는 이 CD에는 서 씨와 운전기사 사이에서 오간 1분가량의 대화내용이 녹음돼 있었다. CD에는 “당신 형제의 친구가 일을 완벽히 해내 그녀가 사라지면(She’s gone) 당신이 그 돈을 가질 수 있어”라는 서 씨의 음성이 담겨 있었다.
국과수는 녹음된 음성이 서 씨의 목소리와 유사하다고 통보했지만, 경찰은 살인을 직접 지시하는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후 사건은 다시 답보 상태에 빠져들었고 경찰은 최근 들어 이 사건을 미제처리 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일요신문>은 비록 이 사건이 미궁에 빠져들었지만 A 씨의 재산 상속 내역을 보면 사건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지난 몇 개월간 이 사건을 취재했다. 취재 결과 당시 언론 보도 내용을 통해 흘러나온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A 씨가 남긴 수백 억대 유산의 행방이다. 당시 몇몇 언론은 A 씨가 남긴 유산의 대부분은 서 씨가 상속했다고 보도했지만 서 씨는 A 씨 소유의 부동산 중 일부만 상속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A 씨는 사망 얼마 전 자신의 유언장 내용을 바꿨다. 바뀌기 전 유언장 내용을 보면 A 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십 억대의 부동산 중 절반을 동생 B 씨, 나머지 절반을 서 씨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전 아무개 양에게 물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동생 B 씨는 몇십 년간 A 씨 재산을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언장 내용이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A 씨와 동생 B 씨 간의 관계는 좋았다고 한다. 반면 A 씨와 두 딸은 가족사로 인해 몇 해 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최근 기자와 서너 차례 만난 서 씨의 주장에 따르면 A 씨가 살해되기 한두 해 전부터 A 씨와 동생 B 씨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했고 반면 A 씨와 두 딸 간의 관계는 점차 호전됐다고 한다.
결국 A 씨는 동생에게 주기로 한 재산 전부를 자신의 두 딸에게 주는 것으로 유언장 내용을 바꿨다. A 씨가 살해되기 한 달 전이었다. 서 씨는 “돈을 어렵게 벌어 평소 의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외삼촌이 어머니 명의의 부동산 및 주유소 등을 자기 소유인 것처럼 주변에 말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외삼촌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외삼촌과 멀어진 어머니는 나를 찾기 시작했고, 나는 어머니에게 이런 저런 신경 쓰지 말고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살 것을 권유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돌연 A 씨가 필리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B 씨와 경찰, 언론 등은 A 씨가 사망하기 얼마 전 자신의 재산 중 25%를 서 씨에게 물려주겠다고 유언장 내용을 바꿨다는 사실과 청부살인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의 서 씨 목소리가 담긴 CD가 발견됐다는 것을 근거로 서 씨를 용의자로 몰아세웠다.
이에 대해 서 씨는 “이미 CD와 관련된 내용은 이미 국과수 및 경찰 조사 결과 ‘관련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며 “재산 문제 때문에 나를 용의자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실 나는 유언장 내용과 관계없이 법적으로 유류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다고 해서 더 이득을 볼 것이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렇다면 A 씨의 죽음으로 재산상의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 누구일까. 서 씨는 두 사람을 지목하고 있다. 먼저 이번 사건을 언론에 제보한 외삼촌 B 씨가 가장 많은 수혜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 씨는 “결과적으로 B 씨는 어머니 사망 이후 현금과 보험금, 부동산 등 수십 억대의 이득을 봤다”며 B 씨에 대한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명의신탁 시비가 있던 땅이 B 씨의 소유로 확정됐고, A 씨가 살았던 B 씨 명의의 아파트에도 현재 B 씨가 살고 있다. 또한 A 씨의 재산을 관리해왔던 B 씨는 A 씨가 숨지기 몇 해 전부터 A 씨의 통장에서 매일같이 100만 원에서 200만 원가량 나눠 인출해 총 20억 원을 인출해갔다. 서 씨 등은 B 씨를 횡령으로 고소했으나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지만 서 씨의 전 남편인 전 아무개 씨도 A 씨가 숨진 이후 큰 수혜를 본 사람이다. 서 씨와 전 씨는 모두 행정고시 출신의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10년 전 가정문제로 이혼했다. 전 씨는 현재도 국무총리실 고위직에 재직 중이다.
이혼 당시 둘 사이에 있었던 딸의 친권은 전 씨에게 있었으며 실제 양육은 외할머니인 숨진 A 씨가 해왔다. A 씨는 평소에 ‘내가 죽어도 손녀딸은 걱정 없이 살게 해줘야 한다’며 유언장에 100억 원대 부동산 지분 절반을 손녀딸 앞으로 남겨 놓았다. 숨진 A 씨와 서 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까지 친권 반환 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A 씨가 숨지자 친권을 가지고 있는 전 씨는 딸이 미성년자라 A 씨 재산을 상속받게 됐다. 전 씨는 A 씨가 살해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딸 앞으로 부동산 소유권 등기를 마쳤다. 특히 전 씨는 지난 6월에 서 씨와 이혼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딸의 주소지를 자신의 집 앞으로 옮겨놓았다.
기자는 전 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통화했는데 전 씨는 “사건은 경찰에서 수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상속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현재 경찰은 필리핀 현지에서 살해범이 잡히지 않는다면 사건을 진척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미제 처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백 억대 재산을 둘러싼 A 씨 가족과 친인척 간의 다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서 씨는 경찰과 국세청 등이 자신에 대한 표적 조사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사건을 둘러싼 진실 공방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누명 벗은 딸 서 씨 인터뷰
대화속 'She'는 운전기사 부인 지칭
―필리핀에서 왔다는 CD 내용은 청부살인을 암시한다고 오해할만하다.
▲운전기사가 이혼하고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이혼도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쉽지 않다며 한국에서 일할 방법이 없냐고 물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관련 내용을 얘기하다 보니 그런 문장이 나왔다. 그리고 알려진 대화내용은 연결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다른 말들을 많이 있었는데 이 부분만 잘 들려 부각됐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나도 영어가 서투르고 필리핀 사람들도 모국어가 아닌데 ‘gone’ 같은 애매한 단어로 청부살인을 할 수 있겠나. ‘die’나 ‘kill’ 같은 직접적인 단어라면 몰라도. 대화속의 ‘그녀(She)’는 운전기사 부인을 두고 한 말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혐의를 벗었지만 아직도 날 범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건이 벌어진 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나갔다.
―상속 문제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게 사실이다.
▲다들 그 문제 때문에 나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내가 재산에 관심이 있었다면 몇 년 동안 어머니와 얼굴도 안 보고 살았겠는가. 아마 외삼촌과 어머니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다면 평생 어머니와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상속 문제를 따지자면 나에겐 유류분이 있었기 때문에 유언장과는 상관없이 그 정도 재산은 받을 수 있다.
―전 남편은 한 번도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면서 가장 큰 수혜를 본 사람이다. 경찰도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전 씨를 한 번도 조사하지 않았다. 현직 국무총리실 고위직이란 신분에 부담을 느낀 듯싶다. 국세청도 이번에 상속과 관련해 나만 조세포탈범으로 몰아 고발했다. 상속세 납부 연대 책임은 전 씨에게도 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