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취업에 성공한 김 아무개 씨(28)는 바쁜 직장생활에도 2~3일에 한 번씩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긴다. 두 사람의 데이트 코스는 매우 평범한데 밥을 먹고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각자 공부를 하는 편이다. 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도 분위기 좋은 바에서 칵테일 한 잔씩을 마시고 때론 영화나 공연을 보는 게 전부다.
이런 김 씨의 데이트 코스는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는다. 기념일마다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야하는 수고로움도 없고 선물 때문에 머리를 싸매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김 씨는 “속 모르는 소리”라며 한숨을 내쉰다.
김 씨는 “여자친구가 명품을 바라지 않고 값비싼 음식점에 가자는 말도 안 한다. 친구들은 그런 여자친구가 개념 있다며 복 받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뜻 보면 우리는 정말 소박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다. 그러나 평범하게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프리미엄’이다. 기념일은 한 번씩만 챙기면 되지만 매번 데이트마다 이러니 스트레스다. 심지어 여자친구는 아직 취업준비생이라 돈을 거의 내지 않아 혼자 매달 100만 원가량의 데이트 비용을 감당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김 씨의 하루 데이트 비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지난 11월 31일 오후 12시 30분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점심으로 김밥을 먹기로 했다. “아침을 늦게 먹어서 별로 입맛이 없다. 간단히 먹자”는 여자친구의 결정이었다.
김 씨는 한 줄에 2000~3000원하는 평범한 김밥 가게를 생각했다. 하지만 15분을 걸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현미와 유기농 재료, 한우만 사용한다는 프리미엄 김밥 가게였다. 김밥 한 줄 가격이 평균 6000원이라 겨우 김밥 두 줄과 음료 하나를 시켰음에도 1만 8000원이나 내야 했다. 참고로 이곳의 최고가 메뉴는 금을 두른 김밥(2만 5000원)이었다.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1만 원이 넘는 커피가 출시되는 등 커피숍도 고급화 바람이 불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김 씨가 볼멘소리를 하자 여자친구는 “이왕 먹을 거 몸에 좋은 거 먹으면 좋지 않느냐. 요즘 고등학생들도 싼 김밥은 안 먹는다. 여자친구 데리고 그런 데 가면 오히려 오빠가 주변 사람들한테 능력 없다고 손가락질 당한다”고 반박했다.
식사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향한 곳은 카페였다. 여자친구는 미리 봐둔 곳이 있는 지 “페이스북에서 봤는데 근처에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가 있더라”며 김 씨의 손을 이끌었다. 수많은 카페를 지나쳐 김 씨는 핸드드립 커피만을 취급한다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때문인지 내부에는 여성들로 가득했다. 여자친구는 김 씨의 신용카드로 커피 2잔과 손바닥보다 작은 케이크를 하나 주문했는데 총 2만 4000원이 결제됐다. 밥값보다 디저트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 것이다.
김 씨는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은 길어야 1~2시간 남짓이다. 주말이면 저녁까지 먹고 헤어지는데 그 사이 다른 카페를 또 가거나 거리를 다니면서 군것질을 한다”며 “이날은 카페에서 나와 유명 초콜릿 가게에서 파는 5900원짜리 아이스크림과 7900원짜리 음료도 먹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여자친구는 배가 부르니 볶음밥이랑 떡볶이나 먹자며 퓨전 한식집으로 이끌어 따라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메뉴판을 본 김 씨는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김치볶음밥이 1만 9000원, 해물 떡볶이는 3만 원에 달했다. 대단한 재료라도 사용했나 싶었지만 음식 맛도 기대 이하였다. 김 씨는 “음식이 나오자 사진을 찍던 여자친구가 ‘분위기 잡는다고 칼질하는 것보다 이런 게 훨씬 편하고 좋다’며 웃었다. 페이스북을 보니 사진을 올리며 ‘가볍게 한 끼’라고 썼더라. ‘여긴 어디냐’ ‘좋아 보인다’ ‘맛있겠다’ ‘부럽다’ 등의 댓글이 달리니 여자친구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렇게 주변 눈치를 보고 자랑하고 싶은 곳만 다니면서 소박함을 강조하니 참 난감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지난달에는 직장상사의 ‘겉멋 충족’을 위해 최 씨를 비롯한 3명의 후배들이 점심시간마저 포기해야 했다. 어디선가 진정한 커리어우먼은 점심을 먹는 대신 몸매를 가꿔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와선 후배들까지 강제로 요가학원에 등록시킨 것. 상사는 운동도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워야한다며 스타 강사가 운영하는 비싼 곳만 고집해 수강료만 월 49만 원을 냈다.
우여곡절 끝에 운동은 시작했지만 상사는 채 보름도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최 씨는 “알고 보니 3명 이상 회원 추천을 하면 자신은 반값 할인을 받을 수 있어 후배들까지 끌어들인 것이었다. 요가학원도 매달 초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다가 열흘만 지나도 수강생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다들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등록했다가 결국 안 나오는 것이었다. 겨우 열흘 운동하면서 운동복과 샤워용품은 뭐 그리 좋은 것만 사는지 수십만 원을 쓰더라. 늘 돈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참 씁쓸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겉멋’ 중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 연인관계는 물론이고 부부사이에서도 겉멋만 추구하는 상대방 때문에 갈등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사포세대’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사포세대’라고 부르는 한 대학생은 “요즘은 뭘 해도 ‘있어’ 보여야 한다. 이제는 진심이 안 통한다. 소개팅을 하고 싶어도 분위기 좋은 카페나 비싼 음식점이 아니면 처음부터 거절을 당하기 십상이고 스터디에 가입하려해도 화려한 스펙을 갖추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다. 이젠 어디서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고 고민했다.
힘든 건 인간관계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일상생활도 힘들어진다. 비싸야 잘 팔린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물가가 너무 올랐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사장님도 싸게 10개를 파는 것보다 비싸게 2개를 파는 게 낫다며 쿠키 가격을 올리더라. 이러니 우리 같은 사람들 주머니 사정은 더 팍팍해졌다. 돈 없어 못 꾸미고 사람도 못 만나고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토로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겉멋 여친 둔 김 씨의 지출내역서 ‘다들 이 정도는 쓰잖아요’ 2014년 하반기 국내 대형 보험사에 취업한 김 아무개 씨(28)의 월급은 약 250만 원이다. 야근비, 특근비, 활동비 등을 합하면 매월 270만~280만 원을 받는다. 이중 고정적인 지출은 150만 원가량이다. 충분한 금액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이다. 최소 일주일에 2번 이상 여자친구를 만나는 김 씨는 매번 데이트마다 10만 원 이상을 지출한다. 그렇다고 호텔 레스토랑을 가거나 비싼 뷔페만 찾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대기업 직장인일 뿐이다. 다음은 김 씨의 11월 어느 날의 데이트 비용이다. △점심으로 라면 2그릇과 음료 1잔, 1만 9000원(복합쇼핑센터에 입점한 프리미엄 라면 가게) △유명 빵집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빵 2개와 커피 2잔, 1만 2000원 △영화 관람, 티켓 2장과 팝콘세트 3만 원 △저녁으로 샌드위치 2개와 샐러드, 음료 4만 2000원을 지출해 총 10만 3000원을 썼다. 특별할 것 없는 데이트 코스, 평범한 메뉴들이지만 김 씨에게 살짝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자친구를 만나지 않는 날 점심, 저녁은 라면 등으로 대충 챙겨먹는다. 비용이 부담된다고 말도 해봤지만 잠시뿐이지 무엇이 잘못된지 모르는 것 같다. 사실 나조차도 이렇게 많은 돈을 쓰고 있는 줄 몰랐는데 많은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서울의 물가가 도쿄에 비해 비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도 고물가 시대에 접어든 데다, 명품 구입은 서민들도 웬만한 것은 ‘카드 신공’으로 가능해지면서 다른 소비행태까지 점점 고급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박] |
최고의 ‘허세템’ 시카고 팝콘 앞 한우가 절할 판 # 팝콘 1갤런 4만 2000원 영화 볼 때나 먹는 줄 알았던 팝콘이 고급 간식으로 탈바꿈했다. 기름과 지방을 사용하지 않고 뜨거운 열기로만 만들어낸다는 미국 시카고 명물 팝콘이 한국에 상륙한 것. 매일 소량으로 생산되는 팝콘은 주말 늦은 오후면 매번 품절돼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이 수두룩하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온갖 통신사 할인카드를 동원하고 신용카드 포인트까지 탈탈 털어 쓰는 이들도 몇 만 원짜리 팝콘 앞에서는 지갑이 무장해제 돼 버린다. 참고로 이곳의 가장 비싼 팝콘(2갤런)은 7만 8000원에 달한다. 시카고 명물 가렛팝콘은 고가에도 인기가 높다. 연말연시 ‘한정판’·‘특별판’ 다이어리도 직장인 필수 허세템 중 하나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털모자 하나에 15만 원 “오빠,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털모자 사줘.”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여자친구와 명품은 아니더라도 10만 원 내외의 선물을 주고받았다는 직장인 박 아무개 씨(29).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생각해뒀다 깜짝 선물을 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엔 여자친구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박 씨는 “털모자가 갖고 싶다며 재료를 사달라더라. 비싸봤자 얼마나 하겠냐는 생각에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콕 집은 브랜드는 미국에서 물 건너온 것으로 실과 바늘 값만도 15만 원이나 하더라. 이것도 인기 색상은 매진이라 짝퉁까지 나왔더라. 없는 물건 구해서 선물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여자친구가 얄밉다”고 고백했다. # 새해맞이 필기구 다이어리 ‘광풍’ 직장인들의 필수 ‘허세템(허세+아이템의 합성어)’가 있었으니 바로 필기구와 다이어리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컴퓨터로 작업하기 때문에 필기구를 쓸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2만~3만 원에 달하는 필기구를 주기적으로 구입하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독일의 L 사 만년필만 고집하는 직장인 이 아무개 씨(여·28)에게 비싼 필기구를 사는 이유를 물었더니 “예쁘고 남들이 잘 안 쓰니까”라는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다이어리도 ‘겉멋’으로 사용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몇 장 쓰지도 않으면서 ‘한정판’ ‘특별판’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일단 사고 본다. 커버와 속지를 따로 사야하는 제품들이 특히 인기인데 매년 새로운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4만~5만 원에 달하는 속지들도 연말연시면 사무실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기 일쑤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