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IOC 집행위원회에서 함께 자리한 로게(왼쪽)와 필자. | ||
8년의 1차 임기를 마치고 지난해 4년짜리 2차 연임에 성공한 그는 사실 고민이 많다. 기본적으로 모스크바 IOC 위원장 선거 때 사마란치 위원장의 절대적인 지원과 편파적인 선거운동, 그리고 유럽 올림픽위원회 총회의 부당한 자금지원(유럽 주재 외신기자들의 말) 등 시작부터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보다 올림픽의 중흥과 IOC의 재정확립 등을 이룩한 전 위원장 사마란치와 비교되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다. 로게는 사마란치만 한 경력과 경륜이 없다. 순전히 사마란치가 후계자로 지정해, 모든 여건을 무시하고 키워준 것이다. 그런데도 로게는 취임 이후 일 년에 한 번도 사마란치에게 연락을 안 한다고 한다. 전임 킬라닌 위원장과 매주 상의를 한 사마란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참고로 최근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IOC의 비화 공개가 있었다. 지난 해 10월 코펜하겐 IOC 총회 직후, 2001년 모스크바 IOC 총회 때 중국 체육장관이었던 위안웨이민(Yuan Wei-Min)이 자서전 형태의 저서를 발간했다. 그런데 그 책에 ‘위안웨이민이 모스크바 IOC 총회 때 중국이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대한 유럽 표를 얻기 위해, 로게와 밀약을 했다. 즉 IOC 위원장 선거에서 당초 김운용의 표로 분류되던 중국의 3표와 일부 아시아표를 로게에게 주는 대신 올림픽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유럽 표를 중국지지로 하자는 약속을 한 것이다. 계약서는 안 썼지만 확실한 거래였다. 심지어 로게에게 약속한 표가 김운용 지지를 철회하지 않으며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자 하진량 위원을 불러서 야단을 치고 3명에게 로게를 지지하도록 지시를 했다’고 돼 있다. 이는 런던의 <선데이타임스>가 보도했는데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보도에 로게는 늘 그래왔듯이 새삼 자기 힘으로 (IOC 위원장에) 당선됐다고 재차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인들에 따르면 2009년 12월 IOC 집행위원회 기간 중에 위안웨이민의 책과 관련된 기사로 인해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았다고 한다.
로게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로게가 라울 몰레(Raoul Mollet)의 뒤를 이어 벨기에 NOC 위원장이 된 직후였다. 그는 귀공자 스타일로 인물이 좋고, 키가 크고 어학에도 능했다. IOC 위원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벨기에 정부가 그에게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로게는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 사마란치 후원으로 IOC 집행위원에 출마했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1997년 네덜란드의 유도영웅 안토 헤싱크(Geesink)가 출마해서 아깝게 낙선한 바 있는데 1998년에 바로 로게와 경합하고 있었다. 사마란치의 입김이 먹혀서인지 헤싱크는 의외로 고전했고, 로게가 쉽게 당선되어 집행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게 됐다.
로게가 집행위원이 된 후 얼마 안 있어 솔트레이크 사건이 터졌다. 로게는 파운드가 위원장을 맡은 임시위원회의 위원이 됐다. 당시 로게는 신출내기였기에 별로 한 일이 없었고,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조차 않았다. 당시 내가 파운드와 충돌 직전까지 갔을 때 로게는 처음 파운드 편에 섰지만 이내 사마란치의 설득으로 중립을 지켰다.
그 후 그는 사마란치에 의해 시드니올림픽과 아테네올림픽의 조정위원장이 되어 경험을 쌓고 사마란치를 따라 세계를 돌면서 힘을 비축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열린 위원장 선거에서 사마란치의 간섭과 비호를 받으며 내게 역전승한 것이다.
▲ 2001년 GAISF 총회 때 싱가포르 고촉통 총리 올림픽훈장 전수식. | ||
이런 와중에 러시아 팀이 피겨스케이팅 심판판정에 불복하며 보이콧 위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쇼트트랙에서 한국의 김동성 선수가 1위로 들어왔지만 방해 행위를 했다고 호주 심판이 실격처리를 해서 미국의 오노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소동’을 넘어 ‘난리’가 났다. 자극적인 언론보도로 인해 “미국에게 메달을 빼앗겼다”는 국민감정이 들끓었고, 이는 심지어 반미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용성 회장이 서울에서 오더니 ‘청와대 행사에서 실세들을 만났는데 아주 나쁘게 평하니 오해를 풀기 위해 한 번 서울에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올림픽경기 기간중이라 가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보면 이렇다. 박성인 한국선수단장은 기자의 질문에 말려들어 “강경하게 모든 조치를 취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외신기자가 ‘강력한 조치에 보이콧이 포함되느냐’고 물었고, 박 단장은 그만 “예스(Yes)”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는 당연히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큰 뉴스가 되었다. 솔트레이크대회는 미국이 9·11 후에 부시 대통령이 직접 신경을 써서 치르는 올림픽이고, 심지어 9·11 때 찢어진 성조기까지 갖다 놓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도 개회식에 참석했고,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현장을 찾았다. 나는 IOC 위원이면서 KOC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입장이었다.
러시아와 한국이 보이콧을 하고, 폐회식에도 참석하지 않으면 올림픽운동과 IOC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솔트레이크 올림픽은 대실패로 끝날 판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로게가 나를 불렀다. “미국 국무성도 걱정한다”고 다급하게 부탁을 해왔다. 로게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한국이 보이콧을 하면 러시아도 할 것이고 결국 올림픽이 엉망이 된다. 그러니 KOC 위원장으로서 성명서라도 내서 좀 분위기를 바꿔주면 러시아도 보이콧은 안 하게 될 것이다”는 것이었다. 이때 내 생각도 한미관계나 향후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를 고려하면 보이콧은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대신 심판판정에 대해서는 IOC, 국제빙상연맹, 스포츠 중재재판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쓰자는 것이었다. 박성인 단장에게 사비로 소송비 5000달러까지 대주었다.
로게에게 “그렇다면 IOC가 성명서를 하나 기안해 달라”고 했고, 이를 언론에 발표했다. 즉 ‘KOC는 심판의 오판을 ISU에 재심요청을 했고, IOC의 로게 위원장도 이해시켰지만 해결 못했고 KOC는 기술적 문제로 항의하는 것이지 IOC나 조직위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성공적인 서울올림픽의 개최자로서 KOC는 올림픽이념을 받들고 한국선수들은 이번 폐회식에도 ‘지금까지의 성공적 올림픽처럼(these so-far successful Olympic Game) 축하할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MBC TV는 앞뒤와 these는 빼고 successful만 부각시켜 메달을 뺏겼는데 무엇이 성공적이냐고 나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미국올림픽위원회와 내 사무실 인터넷은 기능 마비가 될 정도였고, 전화는 하루 수천 통이 걸려 왔다. 나는 정당하게 항의했지만 내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았고, 한국의 언론과 여론은 마음껏 나를 갖고 놀았다.
▲ 2003년 IOC 집행위원회. | ||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전에 쇼트트랙의 4관왕 전이경이 IOC 선수위원에 입후보했다. KOC에서 후보 프로파일 등을 만들어 지원하여 주었고 개인적으로 여비도 보태고 친밀한 관계의 중국, 일본, 스페인 각국 올림픽위원회에 복수투표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동계올림픽의 참가선수 80%가 유럽 선수인 까닭에 절대 불리했고, 결과적으로 전이경은 낙선했다. 그래서 로게를 만나 이런 식 투표는 하나마나이고 지역배분이 안 되니 선수위원 임명직 5명 중에 전이경을 지명하자고 제안을 했다. 로게가 이를 쾌히 승낙해 전이경이 IOC 선수위원이 됐다.
내가 IOC에서 물러난 후 내가 맡았던 IOC TV분과위원장은 로게가 직접 겸직하고 있다. 내가 ‘평창 실패에 따른 사법처리(재미있는 것은 정작 사법처리는 평창과는 상관이 없었다)’를 당할 때 로게는 한국검찰이 제대로 조사도 시작하기 전에 신문만 보고 ‘직무 정지처분’을 내렸다. 자기가 안 해도 한국정부가 자기의 라이벌을 쳐주니 ‘잘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 보고서에는 ‘김운용이 평창유치 실패에 따른 정치인들의 희생양이며, 양심수이고, 일방적으로 밀실조서에 의해 공격받았다’고 되어있다.
이후 로게는 2004년 11월 비공개로, 즉 보도자제를 요청하면서 부부가 서울을 방문, 삼성 리움미술관을 찾았을 때도 나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이해가 안가는 처사다. 또 2005년 ANOC 총회 참석 차 서울에 왔을 때도 당시 김정길 대한체육회장 말에 의하면 ‘내가 리셉션에 나오면 자기는 안 나온다’고 했다 한다. 그래서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사마란치는 당초 잡혀있던 방한일정을 취소하고 일부러 오지 않았다.
2005년 6월 싱가포르에서 IOC 총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싱가포르는 2002년 내가 GAISF 총회를 주재할 때 로게와 함께 분위기를 주도하고, 고촉통 수상에게 IOC 훈장을 수여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 덕에 IOC 총회가 열리게 된 장소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정한 싱가포르 총회를 앞두고 나는 정치적 테러에 IOC 위원직 상실을 요구받게 된 것이었다.
이 싱가포르 IOC 총회를 앞두고 노무현 정부에 의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김정길 대한체육회장과 윤후덕 청와대비서관이 김우식 청와대비서실장(연세대 후배)을 앞세워 세브란스병원과 서울구치소에 번갈아가면서 여러 차례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세 번이나 사표를 받아가면서도 가석방을 취소시킨 바 있다. 정보에 의하면 현재 로게는 평창 편이 아니고, 태권도 편도 아니라고 한다. 또 사마란치도 평창편이 아니고 태권도편도 아니라 한다. 최근에 접한 IOC 전문 미국 대기자의 전언이다. 우리나라가 우리와 다른 문화의 차이를 어떻게 넘어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 국익을 추구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외교는 실리와 확증을 갖고 하는 것이지, 공상과 이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역사가 사마란치를 이은 로게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