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1일 서울 도렴동 외교부청사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대상 중앙선관위의 재외선거제도 및 준비상황 등에 관한 설명회에서 이기선 선관위 사무총장이 선거제도 등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야 정치권은 재외동포 참정권 특위를 구성해 재외국민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재외국민들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부쩍 커지면서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특히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유권자 수가 많은 나라의 동포사회에서는 참정권 시행을 계기로 한국 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일부 인사들 간에 갈등도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포사회 일각에서는 동포사회 권익을 실현하기 위해 주어진 선거권이 오히려 분란만 일으키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재외동포 선거권 시행을 앞둔 교민사회의 천태만상을 쫓아가봤다.
지난해 10월 말 국회에서 열린 해외동포무역경제 포럼 추계 세미나에서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참석자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찍힌 시계 200개를 배포했다. 이에 대해 야당 측은 즉각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해 11월 6일 민주당 김성곤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재외동포를 상대로 한 한나라당의 표 구걸 행위가 도를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 측은 한나라당이 당 차원의 여러 재외동포 관련 기구 등 사실상의 해외조직을 결성해 왔을 뿐만 아니라 모국을 방문한 해외인사들에게 고가의 선물이나 향응을 베푸는 등 선거법 위반 혐의가 짙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 LA에서는 미국 내 한국어 교육 확대를 위한 민간단체가 출범했다. 이 단체에는 한인단체 주요 인사들이 임원으로 참석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단체 지원금으로 연간 150만 달러를 책정했다. 하지만 이 단체의 정체성에 대해 한인언론 등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현지 한인언론인 <선데이저널>은 이 단체는 민간에서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LA 총영사관에서 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그 중심에는 김재수 총영사가 있다고 보도했다.
김재수 총영사는 국제 변호사 출신으로 지난 17대 대선 기간 중 이명박 캠프에서 일하며 BBK 대책위원회를 맡은 인물이다. 이 언론은 “기존단체들을 제치고 이제 막 현판식을 가진 신생 단체에 정부의 예산이 배정된다면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다”는 현지 교육계 인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교포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 중국 교민사회에서도 이 같은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10년 가까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 아무개 씨는 “몇 해 전부터 한국에서 정체불명의 인사들이 건너와 한인단체의 명함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며 “이는 2012년 실시되는 참정권과 관련해 정치권에 줄을 대기 위한 의도가 짙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관련 법안을 보면 재외동포 선거권에 정치권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여야는 각 국에 지회를 두고 있는 민주평통 개편 방안에 대해 각각 법안을 발의해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이 지난해 11월 16일 의원 55명과 함께 공동 발의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법 개정안’은 7000명 이상으로 규정돼 있는 자문회의 정원을 2만 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법안에는 민주평통 사무처장직을 지금의 별정직 고위공무원(1급 상당)에서 정무직(장·차관)으로 격상하고 별정직 고위공무원인 차장직을 신설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간부 자문위원의 활동비 지급에 대한 법적 근거를 두는 내용도 들어갔다.
반면 민주당 송민순 의원이 의원 16명과 지난 2월 3일 공동 발의한 민주평통법 개정안은 현행법에 있는 민주평통의 기능을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또 현행 7000명 이상으로 돼 있는 자문위원 구성을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과 5명 이내의 당연직 위원, 30명 이내의 위촉위원 및 10명 이내의 지명위원으로 대폭 축소하고 국내외 지역회의 및 지역협의회와 사무처를 없애는 방안도 담겼다.
한 단체의 법안을 놓고 여야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배경에는 민주평통이 자문기구 성격을 벗어나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 있는 재외국민을 조직화하고 동원하는 기구로 변해가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민주평통은 선진국민연대 출신인 김대식 사무처장이 사실상 실무를 맡아보고 있다. 김 사무처장은 지난 대선 때 ‘이명박 캠프’ 네트워크 팀장을 맡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최근 ‘US한나라 포럼’이라는 단체를 출범시켰으나 이마저도 교민사회에서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내린 바 있다.
이처럼 재외동포 선거권 시행을 앞두고 한국 정치권은 물론이고 미국 중국 일본 태국 등에서 한인사회가 요동치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한국 정치권의 ‘러브콜’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야 각 정당은 한인사회 내에서 나름대로 조직을 갖추고 경쟁력 있는 인물들을 영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근 들어 국회의원들이 미국이나 일본 등 재외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자주 출장을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지 인사들도 정치권의 ‘러브콜’에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있다. 향후 총선에서 재외교민들 몫으로 2~3석의 비례대표가 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일부 인사들이 이 자리를 노리고 있어 벌써부터 한인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일요신문>이 미국, 중국 등에 거주하는 몇몇 교포들을 접촉한 결과 최근 해외 교민사회에서는 한인회 같은 기존 단체들 내에서 자리다툼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정체불명의 단체들도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정당들과 교민사회에서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일부 인사들 간의 ‘짝짓기’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경우 거의 모든 주에 한인회가 난립해 있다. 미국 내에서도 가장 많은 교민이 거주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는 16개의 한인회가, 뉴욕 주는 15개가 있다. 미국 50여 개 주의 한인회를 모두 합치면 총 158개나 된다고 한다. 가뜩이나 한인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각종 부정선거 시비와 잡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한국의 ‘정치바람’이 불어 닥칠 경우 지지 정당에 따라 교포 사회도 심각한 분열이 우려된다. 여기에 재향군인회, 향우회, 동문회 같은 친목단체들도 ‘정치성’이 뚜렷해지면서 한인 단체장들의 정치권 줄대기 현상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감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30년 넘게 LA에서 살았다는 한 교민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사회를 떠난 사람들이 지금 와서 선거권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한국 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일부 인사들의 논리에 의해 재외동포 선거권이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포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주어진 재외교민 선거권이 오히려 현지 교민 사회의 분열만 불러오고 있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는 이유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