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필자가 민관식 회장에게 올림픽훈장(은장)을 전수했다. | ||
민관식 회장은 도쿄올림픽(1964년)에 갔다온 후 한국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태릉선수촌을 건립했다. 즉 한국선수들이 과학적으로, 그리고 ‘선체력 후기술’을 바탕으로 세계경쟁을 향해 시동을 걸게 만들었던 주역인 것이다. 지금도 태릉선수촌에 가면 민 회장과 필자의 기공, 준공판이 붙어있는 건물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은 추억이지만 세계가 변하고 있고, 다른 나라도 현대식 선수촌을 건립하는 상황인 만큼 이 건물도 빨리 현대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한번은 민 회장으로부터 필자, 이상철 한체대 총장, 박갑철 체육기자연맹 회장이 부부동반으로 저녁을 초대받아 ‘마리(레스토랑)’에 갔다. 이 자리에서 민관식 회장은 선수촌은 자기가 시작했고 국제화는 필자가 한다고 하면서 누가 더 센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한 번 붙어보자. 그럼 심판은 이상철이 보라”고 정겨운 농담을 주고받은 일이 있다. 그만큼 민 회장과는 신뢰와 존경, 그리고 우정이 함께한 사이였다. 언젠가는 필자가 여자농구 대표선수 유영주의 주례를 부탁받은 후에 급히 IOC 출장을 갈 일이 생기는 바람에 주례는커녕 결혼식 참석도 못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도 민 회장에게 부탁해 급한 불을 껐다. 둘(유영주와 민 회장)에게는 지금까지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민 회장은 경기중학과 교토대학 농학부를 조선일보 방응모 장학생으로 마쳤다고 자랑하곤 했다. 또 낙제도 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문교부 장관, 약사회장, 마약퇴치본부장, 장학재단 이사장, 남북조절위원장 등 많은 분야에서 두루두루 활동을 했지만 민 회장은 늘 남북조절위원장 경력을 가장 자랑으로 생각했다. 특히 남을 돕는 일은 무엇이든 나서서 하는 분이었다. 배짱도 두둑해 감히 중등교육의 평준화를 시행하고 우석대학 의과대학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의과대학이 없던 고려대학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공직을 떠나도 공직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바빠서 새벽부터 수시로 전화를 걸고, 사람을 만나고 식사를 같이 했다. 바쁜 일정에도 하루에 반드시 몇 시간은 헬스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테니스를 쳤다. 저녁에는 포도주를 즐기는 대신 식사는 잘 안했다.
1971년에 필자가 대한태권도협회장이 되었을 때 민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이었다. 이때 농구 이병희, 배구 이낙선, 복싱 김택수, 사격 박종규, 빙상 김재규, 축구 장덕진, 야구 김종낙이 가맹단체 회장들이었다.
민 회장은 1971년 11월 30일 국기원 기공식을 할 때 필자와 삽을 같이 들었다(준공식 때는 소강이 해외여행 중이라 김종필 국무총리와 양택식 서울시장, 김택수 당시 체육회장이 참석했다). 또 1973년 5월 역사적인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회식에는 박종규 경호실장과 함께 참석해주었다. 재미있는 기억은 이때 휴식시간에 내 방에서 박 실장과 민 회장이 언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실세 중의 실세였던 박 실장과 언쟁을 벌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 정도로 민 회장은 강단이 있었다. 참고로 이때는 광화문사거리에 아치가 서고 세계태권도대회 기념우표가 발행되던 시절이라 한국은 자랑할 게 많지 않았다. 어쨌든 민 회장은 체육관계 행사에는 시간 있을 때는 꼭 참석했다. 육상과 축구협회장도 지냈고 1960년대 태권도협회가 분규에 휩싸였을 때는 조정자 역할도 했다.
내가 대한체육회장 및 KOC 위원장이 되었을 때 민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의 체육회 명예회장직을 떼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민원’인데 아무 저항감이나 불쾌감이 안 들었다. 묘안을 내서 나의 전임인 김종열 회장과 함께 두 분을 명예회장으로 위촉했다. 그 후 김 회장이 타계하는 바람에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참고로 김정길 씨가 체육회장이 된 후 명예회장에서 민관식의 이름을 일방적으로 빼버려 민 회장이 무척 섭섭해 했다. 그는 체육회와의 관련을 가장 중시하는 분이었다. 한번은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이 신라호텔 중국집에 나를 초대해서 둘이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쪽지가 들어왔다. 식당에 와 있는 민 회장이 나를 불러낸 것이다. 나갔더니 “저 사람이 자기를 체육회 명예회장에서 뺏는데 도로 집어넣어달라고 말 좀 하라”는 것이었다. 들어가서 말을 전했지만 김정길 회장이 들을 리 없었다. 이에 대한 민 회장의 불만은 누차 들었다.
서울올림픽 준비기간 중 민 회장을 대회운영 자문위원장으로 위촉했다. 실제 대회운영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참여를 위해 모양새 좋게 여러 위원들을 두었는데 그 대표를 맡은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정문에서 자신을 출입통제 했다고 해서 박세직 위원장이 있는 자리에서 야단이 났다.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였다.
▲ 위 사진은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선수단 환송(오른쪽부터 김정행 단장, 신민자 부단장, 오영란 선수, 필자, 김종필 총리, 신낙균 문화부 장관, 민관식 전 회장, 주희봉 감독), 아래는 블라터 FIFA회장(가운데) 방한 때 같이 기념촬영한 민관식 전 회장. | ||
참고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민 회장 부부가 KOC를 통해 500달러씩 내고 개회식 입장권을 신청했는데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조치를 취한 기억도 난다. 이에 민 회장에는 G카드(VIP용)를 지급해주고 부인은 내가 사비로 표를 사 주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개회식에 참석한 민 회장은 옆자리의 한 한국언론사 사장이 “괜히 왔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귀빈이 온다고 바르셀로나 공항에 많이도 마중을 나가곤 했다.
민 회장은 태릉선수촌 행사나 체육회 이벤트에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회장인 나보다 당신이 손님을 안내하면서 설명하기도 했다. 민 회장이 하도 그러니 한번은 시찰 나온 이수성 국무총리가 “나는 오늘 김운용 회장을 뵈러 왔습니다”하고 자른 바 있다. 이처럼 스스로 ‘영원한 체육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명예회장에서 쏙 빼내니 명예에 흠집이 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1994년에는 민 회장에게 IOC 100주년 기념패를 드렸다. 무엇보다 명예를 존중하는 분이었는데 체육계에 그토록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드린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에는 IOC에 건의해서 올림픽 훈장을 받아 전수하고, 정원식 전 총리 등 민 회장이 선정한 40명을 신라호텔에 초청, 내 자비로 축하회를 열어드리기도 했다.
민 회장은 88올림픽 이후 사마란치 위원장도 식사자리에 초청했고, 블라터 FIFA 회장의 방한 때는 필자, 박세직 위원장, 오완근 축구협회 부회장을 함께 초청하기도 했다. 김삼훈 대사같이 외국에서 귀임하는 대사에게는 꼭 밥을 내곤 했다. 한번은 갑자기 ‘마리’로 나오라고 해서 가보니 이봉주 선수와 정봉수 감독과 함께하는 점심자리였다. ‘마리’는 한국요리의 대가인 민 회장의 부인 김영호 여사가 관리하는 레스토랑이었다. 민 회장은 자기의 아호를 딴 소강배 국제테니스대회도 장충코트에서 매년 개최해고, 장학 사업도 시행했다. 정말이지 가만히 있질 않는 분이었다. 언제든 수첩을 보면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민 회장은 신라호텔에서 매일 70m 트랙을 60바퀴씩 도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외국에 갈 때는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도 60바퀴 돌고 비행장으로 갔고, 귀국할 때도 공항에서 호텔로 바로 가서 60바퀴를 돌고 집에 가곤했다.
민 회장이 얼마나 화끈한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민 회장이 담배 안 피기 운동에 앞장섰는데 한번은 동석한 자리에서 일본의 체육회장 아오키 한지 씨가 담배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에 한 개비를 달라고 하더니 곧 다시 하나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 갑을 다 받아 물속에 버려버렸다. 김용래 전 서울시장도 민 회장으로부터 담배를 빼앗겨 물속에 버려지는 ‘봉변’을 당했는데, 나에게 “자기가 안 피우면 안 피우지 남 피우는 것까지 빼앗아 물을 부을 필요가 있느냐”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세계태권도연맹의 이종우 사무총장도 “(담배봉변을) 한 번만 더 당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불평하더니 그렇게는 못하고 피해버리곤 했다. 민관식 회장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담배를 안 피우니 아무 일이 없었다.
매일 오후에 헬스센터에서 만나면 같이 걸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친근감에 팔을 꼬집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심하게 멍이 들어 집에 간 적도 있다. 민 회장은 종종 새벽 6시에 우리 집에 전화를 걸기도 했다. 안 받으면 나중에 우리 아내가 혼이 난다. 민 회장이 “그만한 집에 전화 당번도 없냐”며 따진다는 것이었다. 민 회장은 늘 내게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을 해주었다.
내가 평창유치 방해 등의 오해를 받아 고생할 때는 구치소로, 세브란스병원으로, 수시로 면회를 왔다. 한번은 세브란스병원에 면회를 왔는데 “와서 알았는데 이 병원에 정 아무개 씨(정치인)도 있는데 안 보고 그냥 갈 수 없겠지?”라며 둘러보고 갔다. 속에 있는 것은 다 털어놓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다. 심할 때는 말도 막 할 때가 있다. 그러고는 “아이, 우리가 이렇게 발산하고 살아야 오래 산다”고 말한다. 맞는 말 같기도 하다.
2007년 1월 하순에 노무현 정권 시절 고생하다가 출소한 이연택 회장을 위해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민 회장이 떠난 것이다. 나에게 수없이 해줬던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새삼 생각났다. 대한체육회장으로 태릉선수촌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매우 추운 날이었다.
금년 들어 정원식 전 총리가 소강재단 이름으로 체육상 시상을 시작했다. 민 회장의 인덕과 공적을 기리는 전통이 체육계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민 회장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민 회장이 간 지 2년이 되던 해까지도 아무 추모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추모모임도 안 갖느냐 했더니 추모행사가 생겼다. 평생 체육을 사랑하고, 후배체육인들을 아끼고, 긍정적으로 많은 일을 성취한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이 본인의 살아 생전 소원처럼 영원한 체육인으로 오래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