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북한에서 어선을 이용해 탈출, 귀순한 김만철 씨와 가족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의 실상과 탈출 동기 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일본은 재일교포 한 사람에게 통역을 부탁해 이들을 취조했는데 그때 나온 말이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였다. 탈북을 주도한 북한의 의사출신 김만철이 망명의사를 밝히며 한 말이다. 이들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일본은 우리나라 정부에 이들 일가가 한국으로 망명하고 싶은지 확인해보라고 요청해왔다. 김만철이 “따뜻한 남쪽나라”라고만 말하고 있을 뿐 남한이나 다른 특정 국가를 언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연락을 받은 우리 정부는 긴장했다. 휴전 이후 일가족 집단이 탈출한 건 처음인데다 의사라는 엘리트 직업, 배를 이용해 탈출했다는 점 등 사건 전체가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다.
주일대사관에는 김 씨 일가를 즉각 면담하라는 특명이 내려왔는데 우리 외무부가 이규호 주일 대사에게 보낸 훈령에는 “한국으로 망명의사가 있는 경우 결코 북한으로 송환되도록 해선 안 되며 반드시 데리고 와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에 외무부의 대표적 일본통인 주일대사관 이재춘 정무참사관이 교섭의 실무책임자로 나섰으며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에게 친서를 보내 협조 요청을 할 정도로 긴박히 움직였다.
이때 박 전 대사는 이재춘 참사관이 이 사건으로 서울을 방문하자 자신이 직접 보고를 듣기 위해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 씨가 주관하는 모임에 외교부 정무차관보 자격으로 참석했다. 한 가족의 탈북 사건은 이미 한국, 일본, 북한이 주당사자인 국제외교전이 된 상태로 남북관계에 민감한 미국도 이를 주시하며 위성으로 북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김창석 주나고야 총영사가 김 씨 일가를 만나 한국의 발전상 비디오를 보여주며 망명을 권유했고 “가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불법 어획 혐의로 북한에 자국민이 억류돼 있던 일본이었다. 당초 일본은 김 씨 일가를 제주 공해상에 추방할 테니 데리고 가라고 했으나 북한의 눈치를 보다 입장을 바꿔 대만으로 보내기로 했다. 나중에야 미국 방첩부대(CIC)로부터 북한 함정이 공해에 대기 중이어서 자칫 제주해협에서 남북 해군 간 충돌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받아 애초에 ‘제주 이송 작전’은 불가능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내 2월 7일 일본은 김 씨 일가를 대만으로 이송했고 박 전 대사는 이들의 송환 책임자가 돼 대만으로 급파됐다. 보안유지를 위해 외무부 직원들에게까지 과로로 인한 입원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떠났다.
박 전 대사는 백범 선생의 손자로 대만 대사를 지낸 적이 있는 김신 대사와 함께 송환 책임자로 동행하였고, 안기부의 정주영 국장과 그 얼마 전에 비행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소령도 김 씨 일가를 설득하기 위해 합류했다. 김신 대사와 박 전 대사는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장경국 총통과 외무장관을 만나 김만철 일가의 한국 송환 문제를 협의하였다.
박 전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김만철 일가를 처음 본 것은 타이베이 교외에 있는 특수기관 전용의 초대소에서였다고 한다. 큰 키에 똑똑해 보이는 김만철 씨는 불안해하면서도 시종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박 전 대사가 대만에 머무른 것은 만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사 일행은 김 씨 일가가 대만에 도착한 다음날 저녁에 바로 그들 11명과 함께 대한항공 특별기에 올랐다. 그리고 2시간 뒤 한국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작전이었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 후 체포돼 김포공항에서 압송되는 김현희. 연합뉴스
지금까지도 온갖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는 ‘KAL기 폭파 사건’의 중심에도 박 전 대사가 있었다.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경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를 거쳐 방콕을 향해 가던 대한항공기가 공중 폭발하면서 탑승객 11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무부 정부차관보로 있던 박 전 대사는 실무대책본부장을 맡아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사고 당일 밤 박 전 대사는 아랍에미리트로부터 “비행기 승객 중 일본인 여권을 갖고 있는 2명(김승일과 김현희)의 신원이 이상하다”는 급전을 받았고 조사 결과 위조여권임을 확인했다. 이후 김승일은 체포 과정 중 자살했으나 김현희는 목숨을 건져 그때부터 우리 정부의 외교 전쟁이 시작됐다. 김현희의 한국 이송을 위해 바레인, 일본과 외교 접촉을 시작했는데 박 전 대사가 그 교섭의 책임자로서 바레인에 급파되었다. 김현희를 처음 본 박 전 대사는 그 미모에 조금 놀랐다고 한다. 비행기 폭파범이 아니라 곱상한 여대생으로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신 북한 사람이지요?”
박 전 대사의 첫 질문이었다. 김현희는 고개만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신원파악은 안기부에 맡기고 박 전 대사는 국내송환에 주력했다. 문제는 북한과 가까운 시리아와 레바논이었다. 이들이 북한 편을 들며 김현희를 우리나라로 보내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 전 대사는 “피해를 입은 건 우리 비행기와 국민이다” “김현희를 바레인에 오래 두는 것은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며 끊임없이 설득했고 동행한 안기부 요원도 김현희가 자살에 사용한 사이나이드 가스는 전 세계에서 북한만 쓴다는 것을 증명하며 압박했다. 그리고 박 전 대사는 바레인의 카리파 당시 외무장관에게도 “김현희를 바레인에 오래 두는 것은 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고 설득하며 송환작업을 이끌었다. 옥신각신 끝에 12월 14일이 돼서야 김현희를 넘겨받은 박 전 대사는 이튿날 무사히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재 외교부 장관인 윤병세 씨가 그때 담당관으로 특별기에 동승했다.
그런데 이날은 때마침 제13대 대통령 선거 전날이었다. 김현희가 입국하자마자 그의 미모가 화제가 됐고 즉각 “선거일에 맞추느라 김현희를 싱가포르에서 하루 체류시킨 다음에 데리고 왔다”는 등의 온갖 조작설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박 전 대사는 최근 방송까지 출연하며 “터무니없는 추측”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발생 초기부터 우리나라와 각국 재외공관을 비롯해 미국, 일본, 바레인 등 관련 국가의 모든 정보망이 동원돼 어느 일방의 조작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중 일부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될 것인지에 대해 박 전 대사는 회의적이다.
“음모론이란 게 그 자체로 매력적인 데다 공교롭게도 선거 전날에 송환됐다는 원죄(?)가 있다. 때문에 통일이 되어 북한의 비밀문서라도 등장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의혹을 완전히 해소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박수길 전 대사는… 외교 경력 36년 ‘한국의 UN통’ 1996년부터 이듬해까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한국수석대표 및 의장을 맡았으며 2000~2003년 유엔인권소위원회 위원, 2005~2008년 인도적 지원을 위한 유엔중앙긴급대응기금의 유엔사무총장 자문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줬다. 이러한 경력은 2009년 8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39차 유엔협회세계연맹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회장직에 선출되는 원동력이 됐다. 훌륭히 역할을 소화해낸 덕분에 박 전 대사는 2012년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제40회 총회에서도 전원 합의로 재선임 되는 영광을 누렸다. 박 전 대사는 여든을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유엔협회세계연맹 회장 및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장,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로서 미래의 글로벌 지도자를 키워내고 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