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공개된 피의자 박춘봉.
11일 수원서부경찰서에 112신고 하나가 접수됐다. 월세방 계약을 한 남자가 수원 토막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이 된다는 제보였다.
월세방 계약을 한 남자는 박춘봉 씨로 중국동포였다. 지난달 말 가계약을 했다는 그가 월세방에 며칠을 머물렀다는 단서를 토대로, 경찰은 현장 감식에 들어갔다. 미로처럼 생긴 다세대 주택 지하에 위치한 방은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별다른 가전용품이나 개인 물품이 없었지만, 경찰은 그곳에서 핵심적인 증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바로 ‘혈흔’과 ‘비닐봉지’다.
경찰은 발견된 혈흔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DNA를 분석한 결과 수원 토막살인 사건의 피해 여성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했다. 더군다나 집에서 발견된 비닐봉지는 지난 4일 수원 팔달산 산책로에서 발견된 시신을 담은 검은 봉지와 유사했다. 핵심적인 단서라 여긴 경찰은 인근 주민들을 토대로 박 씨의 행적을 물었고, 박 씨가 평소 수원 매산로 S 모텔에 자주 등장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11일 오후 6시 30분쯤. 수사본부가 있는 수원서부경찰서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형사과장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경찰 관계자는 “지금 위층에서 간부회의 중이다. 지금은 만나기 어렵다”라고 전했다. “어떤 회의를 하고 있느냐”고 기자가 묻자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수원서부경찰서에서 긴급회의를 하고 있는 그 시각. 이미 수사팀은 S 모텔 인근에서 잠복수사에 투입된 상태였다. 이후 5시간이 지난 오후 11시 30분쯤. 수사팀은 S 모텔 카운터에서 박 씨의 신원을 파악하고 긴급체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박 씨는 다른 여성과 함께 모텔에 투숙하러 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푸른색 점퍼로 얼굴을 가린 박 씨는 곧바로 경찰서로 후송됐다. 이제 남은 건 박 씨의 자백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뜻밖에도 박 씨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박 씨가 범행을 일체 부인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전했다. 12일 경찰은 박 씨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 프로파일러 5명을 투입하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가 발견된 수원천 인근에서 증거품을 담는 경찰. 작은 사진은 수원천. 사진제공=경기지방경찰청
박 씨가 머물렀던 방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된 점, 유사한 비닐봉투가 발견된 점으로 미뤄볼 때 혐의 입증은 시간문제일 것으로 경찰과 수사전문가들은 예측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13일 박 씨가 자신의 범행을 결국 시인하면서 경찰은 박춘봉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결국 사건 용의자는 이렇게 잡히게 됐지만, 곳곳에 감춰진 미스터리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여전하다.
특히 이번 사건이 불거지면서 시신에 장기가 없다는 점을 미뤄, ‘장기매매’ 의혹은 계속해서 점화될 전망이다. 이 같은 의혹이 사건 초반 SNS을 통해 불거지자 경찰은 이례적으로 “국과수의 부검 결과 장기밀매나 인육캡슐과의 연관성은 희박하다”며 사태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수사전문가들도 장기매매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권영회 전 서울시경 수사팀장은 “중국 현지는 몰라도 국내 장기매매는 가짜가 많다. 이번 사건의 잔혹함을 볼 때 장기매매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박 씨의 다른 여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배반이나 다툼이 숨어 있고, 시신을 훼손한 것은 증거인멸의 목적이 클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지난 2012년 발생했던 ‘오원춘 사건’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당시 불거졌던 장기매매 의혹은 또 다시 재점화돼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의혹은 ‘연쇄살인’ 의혹이다. 일각에서는 시신을 비닐봉투에 담아 곳곳에 유기하는 등의 대담성을 들어 박 씨가 초범이 아닐 것으로 예상하는 시각이 높다. 수사전문가는 이를 두고 “자신이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숨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앞서의 권 전 수사팀장은 “통상 중국 동포는 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는 경우가 있어 신원 파악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박 씨의 경우도 그 부분을 파악해 시신을 훼손한 후 그냥 행인들이 보이는 곳에 유기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분석했다.
경찰은 박 씨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입건해 조사하는 한편, 시신유기 장소가 수원과 화성 경계지점에 있다는 정황도 포착해 수색을 이어가고 있다. 박춘봉과 토막시신 피해자인 중국동포 김 아무개 씨(여·48)가 어떤 관계였는지도 조사 대상이다. 김 씨의 언니는 경찰 조사에서 “김 씨와 박춘봉이 올해 4월부터 동거를 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살인현장 직접 가보니 ‘오원춘 악몽’ 오버랩 수원 토막살인 사건은 지난 4일 오후 1시쯤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 산책로에서 한 등산객이 신체 일부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하면서 밝혀졌다. 발견된 시신은 국과수 부검 결과 장기 대부분이 없는 여성 몸통으로 확인됐다. 이후 지난 11일 오전 11시쯤 시신이 발견된 현장과 1㎞가량 떨어진 수원 매교동 수원천에서 속옷과 시신 일부 살점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기자는 지난 11일 직접 시신이 발견된 현장을 찾았다. 시신이 처음 발견된 팔달산 산책로는 으슥한 기운이 가득했다. 산책로를 걷던 한 지역주민은 기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남 아무개 씨(여·67)는 “웬 남자가 그곳을 돌아다니기에 혹시나 해를 입을까 깜짝 놀랐다. 평소에 이곳을 자주 다니는데, 시신 발견 이후 사람이 확 줄었다. 앞으로 이곳은 무서워서 혼자 오지 못할 것 같다”라고 전했다. 또 다른 사건 현장인 수원천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 인력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의경 인원들은 증거물로 추정되는 검은 봉지를 들고 수사팀 차에 싣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증거품이냐”고 기자가 물으니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2012년 ‘오원춘 사건’이 발생한 곳인 수원 팔달구 지동 주택가와 1.3㎞가량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지역 주민들은 ‘제2의 오원춘’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니냐며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또 다른 지역 주민은 “화서동과 지동, 수원역 인근은 이미 중국 동포들이 엄청 많이 사는 동네다. 특히 세를 놓는 곳에는 중국 동포들이 많아 집주인들이 괜히 무서워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이런 사건이 계속 발생하니 아무래도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