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이 홈런을 때려내는 모습. 전통적으로 KIA 선수들은 유니폼 색깔과 비슷한 붉은 계열의 배트를 선호한다.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배트는 만드는 사람에게도, 쓰는 사람에게도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프로용 배트는 모두 맞춤 생산한다. 선수의 체격이나 스윙 스타일에 따라 무게와 길이, 구조가 달라진다. 야구 규칙에는 경기 때 사용하는 배트에 대해 ‘가장 굵은 부분의 지름이 10㎝ 이하, 길이 42인치 이하여야 하며 하나의 목재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무게는 개인 재량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선수들은 길이 33~34인치에 무게 850~910g 정도의 배트를 가장 많이 쓴다. 이보다 길면 몸쪽 공 대처가 어려워지고, 이보다 무거우면 스윙 스피드가 떨어져서다.
배트 공정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손이 많이 간다. 일단 큰 통나무를 자른다. 예전에는 물푸레나무를 많이 썼고, 요즘은 단풍나무가 대세다. 배리 본즈가 단풍나무 배트로 72홈런을 때려낸 사실이 알려진 후 국내 업체들도 단풍나무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LG 박용택이나 두산 홍성흔처럼 여전히 물푸레나무를 선호하는 선수들도 많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수입된 원목은 제재소에서 절단된 뒤 고주파를 사용해 건조된다.
그 다음은 컴퓨터로 제어되는 공작기계를 사용해 원목을 결대로 자른다. 배트 스타일에 따라 사용하는 나무의 부위도 달라진다. 통나무 중심에 가까운 게 장거리 타자용, 테두리 부분에 가까운 게 단거리 타자용. 중장거리형 타자는 그 사이 부분을 쓰면 된다. 나무 중심으로 갈수록 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친 나무를 영하 30℃의 냉동 창고에서 한 달간 저온숙성 시킨다. 한 달이 지나 상온에 꺼내 놓으면 나무가 녹으면서 그 안에 배어있던 수분이 빠져 나온다.
이렇게 숙성시킨 나무는 고주파 기계에서 120시간 정도 건조시킨다. 습도(57mmHG)와 온도(38℃) 조절은 필수. 배트는 수분함유량이 6~8% 정도여야 최상의 탄력이 나온다. 선수들이 훈련 후 더그아웃에 배트를 일렬로 늘어놓는 이유도 땀이나 습기가 밴 배트를 말리기 위해서다.
# 완성될 때까지 깎고 또 깎는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이렇게 배트가 완성되면 선수들의 주문에 따라 색을 입히고 이름과 번호를 새긴다. 요즘 선수들은 취향이 확실해서 좋아하는 배트 색이 따로 있다. 전통적으로 해태나 KIA 선수들은 유니폼과 비슷한 붉은 계열의 배트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 이승엽은 2000년대 초반 “강해 보여서 좋다”는 이유로 검정색 배트를 선호했고, 넥센 박병호는 색을 입힌 배트보다 원목 그대로의 느낌을 좋아한다.
# 한 자루에 15만 원, 알고 보면 비싼 배트
이렇게 길고 세밀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배트. 당연히 가격이 만만치 않다. 보통 한 자루에 10만~20만 원 정도. 미국이나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 배트는 30만 원까지 치솟는다. 1990년대까지는 선수들이 대부분 자비로 배트를 사야 했다. 새로 산 배트 하나가 경기 중에 부러지기라도 하면 속이 다 쓰렸을 정도다. 2000년대 이후로는 각 구단들이 배트 교환 쿠폰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1군 선수들에게 15만 원, 2군 선수들에게 10만 원짜리 쿠폰을 지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금액을 초과하는 배트를 사려면 선수가 추가비용을 내야 한다. 상대적으로 연봉이 적은 2군 선수들은 당연히 좋은 배트를 쓰기 어렵다.
배트 구입에 돈을 안 써도 되는 방법은 역시 야구를 잘하는 것밖에 없다. 1군의 주전급 선수들에게는 배트 업체들이 먼저 후원을 제안한다. 1년에 수십에서 수백 자루씩 제공한다. 통 큰 선배들은 이 배트를 후배들에게 한두 자루씩 나눠주기도 한다. 누군가 깜짝 홈런을 쳤을 때 “아무개 선배의 배트 덕분”이라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유다. 어떤 선수는 선배가 준 배트를 사용해본 뒤 뒤늦게 “마침내 내 느낌을 찾았다”며 자신이 쓰는 배트의 사양을 바꾸기도 했다.
요즘에는 정규시즌 MVP에 오른 넥센 서건창의 배트가 선수들의 관심사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배트, 잘 쓰려면 잘 관리하라
배트에도 유행이 있다. 당연히 한창 잘 치는 타자의 배트가 ‘트렌드’다. 삼성 이승엽과 심정수가 나란히 50홈런을 넘겼던 2003년에는 수많은 선수들이 배트 제작업체에 ‘이승엽 배트’와 ‘심정수 배트’를 주문했다. 한화 이용규가 2008 베이징올림픽과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맹활약한 뒤에는 체격이 작은 타자들을 중심으로 ‘이용규 배트’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요즘에는 올해 201안타를 치면서 정규시즌 MVP에 오른 넥센 서건창의 배트가 선수들의 관심사다. 길이 33.5인치, 무게 860~870g로 딱 평균적인 배트지만, 헤드의 두께가 같은 조건의 다른 배트들에 비해 얇은 편이라고 한다.
같은 기술자가 같은 조건으로 만든 배트라 해도 모두 똑같지는 않다. 열 자루를 휘두르면 열 자루의 느낌이 다 다르다. 그 가운데 손에 맞는 배트 서너 자루가 따로 있다. 오직 그 배트를 사용하는 선수들만이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트 관리가 무척 중요하다. 그냥 방치해 놓으면 모양이 변형되거나 무게가 달라진다. 특히 장마철에는 더 주의가 필요하다. 배트를 상온에 보관하면 습기가 차서 20g 정도 무거워진다. 선수들이 여름에 배트 무게를 10~20g 정도 가볍게 하는 이유가 꼭 더위로 인한 체력 부담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일부 베테랑 선수들은 ‘고온건조’한 자동차 트렁크를 최적의 배트 보관 장소로 꼽는다. 또 요즘은 각자 집에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배트 보관함을 설치하는 선수들도 많다. 최상의 무기를 손에 쥐어야 전쟁터에서도 자신감이 한껏 살아나기 때문이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부정배트 논란 나성범, 까마귀 날자 성적 뚝 ‘억울합니다’ 오해는 6월 18일 4개 구장에서 동시에 진행된 배트 검사에서 시작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원래 한 시즌에 3~4차례 정기적으로 선수들의 배트를 체크한다. 그런데 올해의 검사는 유독 화제를 모았다. 전례를 찾기 힘든 ‘타고투저’ 때문에 ‘핸드볼 스코어’가 속출하던 시점이어서다. 타자가 공의 비거리를 늘리거나 반발력이 늘어나도록 배트를 개조·가공했다고 판단되면 부정배트로 간주돼 징계를 받는다. 배트 사이에 이물질(코르크 등)을 끼우거나 표면을 평평하게 하거나 못을 박거나 속을 비우거나 홈을 파거나 파라핀 왁스를 칠하는 행위 등이 해당된다. 물론 나성범의 배트에서는 이런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KBO 규정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지극히 정상적인 배트였다. 그러나 심판위원들이 마산구장에서 NC 타자들의 배트를 찍는 모습이 온라인 사진뉴스로 송출되면서 마치 ‘NC에서 부정배트가 발견됐다’는 뉘앙스의 오해가 불거졌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후 나성범의 성적이 하향곡선을 그렸다. NC 관련 기사의 댓글은 순식간에 ‘나성범이 부정배트를 쓴 게 아니냐’는 악의적인 의혹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타구에 발등을 맞아 몸이 좋지 않았던 나성범은 심리적인 타격까지 입었다. NC 관계자들과 동료들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건 NC 김경문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후반기 첫 경기를 앞두고 나성범에게 자신이 직접 주문한 배트를 선물했다. 부진과 마음고생을 모두 털고 새로운 ‘기’를 받으라는 의미였다. 나성범은 후반기부터 다시 살아났고, NC의 창단 첫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 정도면 훈훈한 사례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2012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사령탑을 맡았던 이정훈 당시 천안북일고 감독(현 한화 2군 감독)은 한일전을 앞두고 “일본 선수들이 압축배트를 사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배트 안에 코르크를 넣은 압축배트는 일반 배트보다 반발력이 뛰어나 공식 경기에서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감독은 “일본 배트에서 ‘딱’ 소리가 아니라 ‘탕’ 소리가 난다. 빗맞은 타구도 쭉쭉 날아가는 것을 보면 압축배트가 확실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망치를 가져와서 직접 확인이라도 해 보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전혀 근거는 없는 얘기였다. 한국은 일본에 4-2로 졌다. 이 감독은 경기 후 “특정팀을 겨냥한 발언이 아니었다. 이날 경기에서는 일본이 정상적인 배트를 사용한 것 같다”고 물러섰다. 일본 대표팀 감독도 “한국이 제기한 논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실패한 심리전. 실력도 매너도 모두 졌다. [은] |
배트 무게와 홈런의 방정식 방망이도 다이어트 열풍 무거운 배트를 쓰면 타구가 더 멀리 날아간다? 오래 전부터 야구계를 지배했던 속설이다. 거포형 타자들은 가능한 한 길고 무거운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섰다. 물론 지금도 이런 추세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최대 무게는 확실히 점점 가벼워지는 분위기다. 한화 김태균의 타격 모습. 삼성 이승엽은 2003년 56홈런을 칠 때 1㎏에 육박하는 배트를 사용했다. 홈런타자 치고 몸무게가 적었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상대팀이나 타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적게는 930g에서 많게는 960g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중 대신 배트 자체의 원심력을 이용해 타구를 부드럽게 담장 밖으로 넘기곤 했다. 올해 52홈런을 친 넥센 박병호는 당시의 이승엽보다 50g 가벼운 890g의 배트를 쓴다. 타고난 힘과 체중에서 앞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배트를 잡고 벼락처럼 돌린다. 빠른 배트 스피드에 체중까지 실려 타구가 끝없이 날아간다. 한때 프로야구 거포들에게 배트 무게는 자존심이었다. 배트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타구가 멀리 나간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1㎏짜리 배트에 도전하는 타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 체육과학연구원은 “질량을 늘리는 것보다 속도를 빠르게 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그 편이 더 많은 에너지를 창출한다는 얘기다. 삼성 시절 심정수가 800g대의 가벼운 배트로 50홈런을 날렸던 게 좋은 예다. 20대 때 960g짜리 배트를 썼던 이승엽도 30대 후반인 요즘은 880~890g짜리 배트를 든다. 올 시즌 초반 슬럼프를 겪은 한화 김태균 역시 배트 무게를 50g 낮추면서 효과를 봤다. 930g짜리 배트를 880g으로 바꿔든 뒤 한 달여 동안 홈런 8개를 몰아쳤다. 소프트뱅크 이대호는 2010년 롯데에서 9연속 경기 홈런 기록을 세울 때 평소 쓰던 950g에서 20g을 낮춘 배트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불과 20g 차이지만 타자들이 체감하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일부러 훈련 때는 경기 때보다 무거운 배트로 스윙을 하는 선수도 많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묶고 달리다가 그 주머니를 풀고 달릴 때 한결 가볍게 느껴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