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이 2008년 10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오찬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
박세직 회장의 늠름하고 당당하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빈소에서 자세한 사망경위를 들으니 더욱 안타까웠다. 재향군인회장으로 나라의 흐름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몰두하다가 과로로 입원했고, 이것이 폐렴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문득 내가 다섯 살 때 나의 선친(김도학)이 대구의 조선민보사 경리부장 겸 서무부장으로 있으면서 연말에 감기가 심한 몸을 끌고 하루 종일 결산업무를 보다가 급성폐렴으로 운명을 달리한 기억이 떠올랐다.
고 박세직 회장은 육사12기 출신의 정통 직업군인이었다. 통솔력과 군인다운 멋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국제적이고 학구적이면서 나라에 충성하는, 보기 드물게 멋있는 사람이었다.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되니 있는 시간을 최대한 계획적으로 쪼개서 유익하게 쓴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내가 직접 본 박세직 회장의 모습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중위 때 미 1기갑사단장의 전속부관이었던 것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마친 후 서울올림픽 준비기간 중에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박사학위 취임식에는 나도 가운을 입고 나오라고 해서 참석한 바 있다.
또 그가 1980년 12·12 사태 이후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라이온즈클럽 모임에서 3사단장으로 사병들 군생활의 현대화와 부모들이 마음 놓고 자제들을 군에 보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을 직접 듣기도 했다. 너무나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후 박세직 ‘장군’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명망이 올라가더니 갑자기 체포되어 2등병으로 강등되었다가(공식적으로 육군 소장 예편) 곧 한전 부사장, 총무처 장관 그리고 체육부 장관이 되었다. 그때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은 노태우 장군이고 박세직, 필자, 조상호가 부위원장이었다. 그런데 곧 노태우 위원장이 민정당 대표를 겸임하게 되자 체육부 장관이 된 박세직이 조직위원장이 되고 이때부터 서울올림픽은 박세직이 국내정치, 재정과 조직위원회 통솔 및 대회준비를, 내가 IOC나 국제경기연맹 문제, TV방영권 교섭, 소련 등 동구권 참가문제 등의 실무책임을 맡으며 쌍두체제로 함께 일을 하게 됐다. 당연히 박세직 위원장과는 형제 같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의 업무 스타일은 내가 하는 일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가끔 국제회의에도 나가고 IOC 집행위원회에도 참석했는데 박 위원장과 내가 교대로 참석하곤 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그토록 위풍이 당당한 박 위원장은 사실 공식적인 영어연설을 앞두면 비행기 안에서 영문연설문을 외우는 등 2~3일씩 진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곤 했다. 한번은 연설문을 통째로 암기해서 안 보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한 페이지를 빼먹어 어쩔 수 없이 연설문을 보고 읽은 후 크게 아쉬워하기도 했다. 군인 출신 치고는 영어도 잘해서 조직위원장으로서 그 많은 방문객을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1986년 박종규 IOC 위원 후임을 놓고 사마란치와 당시 청와대(전두환 대통령)가 의견 충돌을 빚고 있을 때 박세직은 나를 지원하는 편에 섰다. 또 체육부 장관을 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 중에서 빼내려고 청와대가 나를 내정했을 때는 “올림픽을 치르려면 김 부위원장을 빼내면 안 된다”고 청와대에 강력히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상호 부위원장이 체육장관이 되었는데 그 모든 일이 해외 출장 중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귀국하니 박 위원장은 나에게 “장관은 나중에 하면 되니 마음을 풀라”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마음이 여리고 인정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실 서울올림픽은 아무리 내가 IOC와 함께 많은 난제를 처리했다 해도 그 큰 조직을 통솔하는 박 위원장의 리더십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1986년 9월20일부터 10월5일까지 86서울아시안게임을 올림픽의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고 27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개회식 날 비가 와서 좀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한국의 성적이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벌금까지 내며 대회를 반납한 경험을 직접 한 나로서는 더욱 감개무량했다.
아시안게임 후 10월이 되어 박세직 체육부 장관과 필자 일행은 로잔의 IOC총회에 참석해 “이제는 서울 올림픽이다”라는 자세로 준비사항을 보고했다. 10월17일 총회 폐회 직전에 나는 IOC 위원에 선출됐고, 그날 시내 중국식당에서 박세직 내외가 축하연을 열어 준 생각이 난다. 그 자리에는 고 박종규 IOC 위원의 부인 이종원 여사도 초대됐다. 사마란치는 물러난 IOC 위원의 부인을 한 번씩 초대하는 동지애를 보였다. 그런데 로게가 부임한 후에는 아닌 것 같다.
▲ 서울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위)와 올림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세직 위원장과 필자. | ||
합의 후에도 몇 번씩 협상 결렬 과정을 거쳐 겨우 계약서 서명식을 로잔 IOC본부에서 하게 됐고, 이에 대해 박세직 장관과 같이 청와대에 보고를 하러갔다. 박 장관은 “노태우 조직위원장은 당무에 바빠서 못가니 김운용 부위원장이 대신 가서 계약서 서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도 “직적 교섭을 했고 계약서를 합의 본 김 부위원장이 가서 책임지고 처리하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서 되겠느냐”고 했다. 계약서 내용 교섭이 몇 개월 늦어지는 바람에 약속한 1차 지불 기간이 늦어졌다. 우리는 NBC 측에 돈을 더 내라고 요청했고, 그걸 은행이자로 환산해 200만 달러를 더 받아내 NBC TV 방영권은 3억 200만 달러가 됐다. 그때 돈으로는 큰돈이었다. 재원 확보도 큰 소득이었지만 서울올림픽의 안전보장을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특히 EBU(유럽방송연맹)과 OIRT(동구권방송연맹)에는 서유럽 및 동유럽공산국이 전부 가입돼 있었고, 많은 방송사가 정부방송으로 구성돼 있어 그들의 서울올림픽 참가에 이정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방송권 협상 타결이 외교관계로도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결과적으로 나중에 꼭 맞아떨어졌다. 여기에 한국문화를 무료로 세계에 알리는 광고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한편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참가가 서울 올림픽 성공의 열쇠였다. 이때 소련을 비롯한 문화사절단의 서울 공연을 꼭 유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많았고, 청와대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동아일보 사업국(국장 김정웅)이 소련의 고스콘서트와 교섭,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등을 끌고 오기로 합의를 봤는데 이에 조선일보가 ‘(동아일보) 혼자 다 하느냐’고 들고 일어났다. 박세직 위원장이 중재에 나섰다가 진전이 없자 나에게 맡겼다. 내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고스콘서트, 동아일보와 나 이렇게 3자가 계약서를 썼다. 내용은 모스크바필교향악단은 동아일보가, 볼쇼이 합창단과 발레단은 조선일보가 각각 주최하는 식으로 타협을 봤다.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의 예술이 서울에 선을 보이게 되었고 그 후 문화교류, 경제교류, 외교관계로 이어졌다. 이 덕에 나는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88서울올림픽은 그 자체로 북한에게 중한 타격이었다. 바덴바덴에서부터 반대공작이 거셌고, 나중에는 구소련 블록의 보이콧을 위한 외교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동구권이 서울올림픽에 미소를 보내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자 북한은 남북 공동개최안을 제시, IOC와 동구권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IOC 주최로 사마란치가 로잔에서 남북체육회담을 열었다. 한국 측은 KOC 김종하 위원장이 유연한 태도로 회담에 임했지만 어디까지나 올림픽 개최의 책임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인 박세직과 대외실무 총책임자인 필자에게 있었다. 첫 번째 회담은 예상대로 남북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고, 사회주의 국가들은 서울올림픽 참가의 명분을 찾기 위해 박세직 위원장과 내게 북한에 많은 종목을 주도록 압력을 넣었다. 예컨대 동독의 에발트 체육장관도 6, 7개 스포츠를 분할할 것을 서울에 와서 권고했다. 에발트 장관이 서울에 왔을 때 국기원으로 초대하고 처음으로 태권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IOC 전문가들은 8개 아니라 12개를 준다 해도 북한이 못 받아들일 것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1987년 5월 루마니아의 시페르코 IOC 위원이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왔다. 이때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 유혈을 각오하라”고 위협하고 있었다. 박세직 위원장은 북측을 두둔하는 시페르코의 제안을 듣고 격론을 벌였다. 서울조직위가 북에 문은 열어놓고 있지만 올림픽 개최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서울에 있는 것이지, 공동개최, 명칭의 변경(서울평양올림픽)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전했다. 결국 박세직 위원장과 필자는 정부와 협의해 4번째 회담에서 남자탁구, 양궁, 여자배구, 축구예선 1그룹, 남자사이클 도로경기를 제안했고, 북한은 예상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북체육회담은 흐지부지 끝났다. 하지만 참가명분을 얻은 동구권 국가들은 12월 20일부터 1988년 1월 10일 사이 헝가리에서부터 시작해 소련, 중국의 참가 발표가 이어졌다. 나는 그 발표 스케줄을 미리 소련체육성 가브리린 차관으로부터 연락받고 박세직 위원장과 청와대를 안심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울올림픽에는 12년 만에 동서가 하나 되는 ‘위대한 올림픽’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고 개회식은 문화행사가 반이었다. 박세직 위원장은 가능한 많은 한국의 문화인들을 총동원해 개막식에서 한국문화의 모든 것을 보이도록 했다. 춤은 물론이고 민속놀이에다 태권도 시범까지 총망라했다. 서울올림픽과 함께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한 문화국가가 된 것이다. 모두 박 위원장의 공이 컸다.
올림픽 폐막 다음날 박세직 위원장과 필자는 기자회견을 갖고 올림픽잉여금 2000억 원을 체육 발전에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그 중 100억 원은 KBS, 100억 원은 서울평화상위원회, 150억 원은 장애자올림픽, 그리고 내가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100억 원은 예술인총연합회에 기부했다. 그 후 박세직 위원장은 체육기금이 체육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체육진흥공단을 만들었다(그리고 이후 안기부장, 서울시장을 거쳐 국회에 진출했다). 오늘날 체육회나 각 경기단체가 받는 지원금, 메달리스트들이 받는 상금은 그때 만든 기금과 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여의도 침례교회에 가면 박세직 안수집사의 봉사를 늘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못 보게 되었다. 고인을 마지막 본 것은 침례교회 앞에서 자기 아들이 미국에서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기쁘게 알려주었던 모습이었다.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더 큰 할 일이 많은데 운명을 달리해 아쉽기만 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