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민간단체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가 친북·반국가행위자 명단을 발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한 보수단체 회원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1차 명단에 넣어야 한다’며 주최 측에 항의하는 장면. 연합뉴스 | ||
추진위가 발표한 1차 명단에는 친북·반국가 행위 대상자 후보 5000명 중 100명이 우선 등재됐는데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추진위는 이번에 발표된 1차 명단을 근거로 8월 15일 인명사전(1) 발간과 2차 명단 200명 추가 발표, 그리고 12월엔 인명사전(2) 발간할 뜻을 밝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등재된 것에 대해서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무덤덤해하면서도 국론이 분열되고 또다시 색깔논쟁이 야기되는 현 분위기에 대해서는 심히 짜증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편찬 전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친북인명사전의 주요 쟁점 및 1차 명단에 포함된 100인 중 주목할 만한 인사들의 항변을 들어봤다.
추진위에 따르면 ‘친북인명사전’은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훼손하는 반헌법적·반국가적 활동을 한 인사들의 활동내역과 사상성향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추진위 측은 편찬취지와 관련해 “친북·반국가행위자들의 폐해와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려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와 국가정체성을 수호하여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선진화에 기여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추진위 측은 지난 2006년 5월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 발족을 시작으로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작업을 거쳐 1차 명단을 발표했다. 추진위는 1차 대상자 선정기준에 대해 “총 대상자 5000명 중 현재 활동 중인 자,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자, 친북·반국가행위가 명백한 자’를 우선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재야운동권 인사들이 36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학계 17명, 정치권·관계 14명, 종교계 10명 순이다. 특히 명단에는 전 국회의원을 포함한 유력 관계 인사들뿐 아니라 현역 국회의원도 3명이나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추진위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 극과극으로 갈리고 있다. 보수진영 측에서는 “국가 정체성 회복과 헌정질서 유지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며 토마토성향(겉도 붉고 속도 붉은) 친북반국가 행위자뿐만 아니라 수박성향(겉은 파랗고 속은 붉은) 친북 반국가 행위자까지도 광범위하게 색출하여 기강을 다져야 한다”고 지지의사를 밝혔다. 반면 진보진영은 ‘미운털 뽑기’ 행각으로 규정, 색깔논쟁 등으로 인한 국론분열을 우려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제는 추진위의 작업이 객관적 기준이나 잣대에 의한 것인지 여부다. 이는 추진위가 과연 이런 예민한 작업을 추진할 공신력을 갖고 있는 집단인지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위원장인 고영주 변호사가 공안검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데 지난번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이 작업을 추진했던 민족문제연구소와 임헌영 소장의 성향 논란이 이번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추진위는 위원장인 고영주 변호사를 필두로 안응모 전 내무부 장관, 조영기 고려대 교수, 이동복 전 국회의원, 정기승 전 대법관,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류석춘 연세대 교수 등이 뜻을 모아 지난 2008년 6월 발족한 단체다. 추진위가 밝힌 세부기준을 보면 크게 ‘북한당국노선을 고무·찬양·선전·동조한 자(친북행위)’와 ‘헌법질서 부정·파괴 및 국가변란 선전선동자(반국가행위)’로 요약된다.
1차 명단에 등재된 정치권·관계인사는 총 14명으로 강기갑 권영길 최규식 의원,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김창현 민노당 울산시당위원장,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이재정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손장래 전 안기부 차장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현역 의원 중 최규식 의원은 ‘등재됐음직한’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명단에 올라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최 의원은 3월 12일 성명을 통해 “꼴통 극우세력의 웃기는 작태”라고 힐난했다. 최 의원은 본인이 지목된 이유에 대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촛불시위 참가자의 가족에 대한 연좌제 수사를 폭로하면서 법적 근거도 없는 공안사범조회리스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철폐를 촉구한 것과 지난 17대 국회에서 국민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빨간 칠을 하던 경찰 공안문제연구소를 폐지시킨 것 등이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최 의원 측 안정곤 보좌관은 “의원님도 왜 자신이 명단에 올라있는지 모르겠다 하신다. 이의신청 생각도 없고 법적 대응은 추후 상황을 지켜보며 다른 등재인물들과 보조를 맞출지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전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양식 있고 신망 높은 분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되어 저로선 영광”이라며 한층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추후 대응 여부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발표가 아니기에 노코멘트하겠다.
이의신청할 생각도 없다”는 뜻을 밝혔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한마디로 코미디다. 대체 최규식 의원은 왜 들어간 건가. 한참을 웃었다. 개개인의 실명을 거론하는 만큼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신중한 작업이 이뤄졌어야 했는데 순전히 주먹구구식이고 엉터리다.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매도하기 위한 악질적인 의도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가 등재된 것과 관련해 당 관계자는 “이 대표 본인은 언급할 가치도 못 느끼는 것 같다. 객관적 잣대가 없을 뿐 아니라 검증이 안 된 단체 아닌가. 해명해야 할 부분이나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해야 하겠지만 대표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이의신청 의향도 없고 법적인 대응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권영길 의원 측 양호경 보좌관은 “추진위가 대체 어떤 조직인지도 모르겠다. 하도 기가 막혀서 의원님께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당 차원에서 대응방안도 거론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강기갑 의원 측 오삼언 국장은 “강 의원님이 내용을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며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야·노동권 인사 중에는 문성현 전 민노당 대표와 박석률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의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임동규 통일광장 대표 등 총 36명이 등재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한편의 어설픈 코미디가 <친일인명사전>을 겨냥하고 있다는 데에 모욕감을 감출 수 없다”며 “소아병적인 집착과 편견에 사로잡힌 수구단체는 해괴한 인명사전 소동을 즉각 멈추고 근거 없는 모략에 대해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백기완 소장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 너무도 터무니없는 것이기에 아예 언급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해왔다.
▲ 왼쪽부터 최규식 의원, 노회찬 의원, 백기완 소장, 손호철 교수 | ||
학계에서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와 손호철 서강대 교수,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욱 카톨릭대 교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총 17명이 선정됐다. 강정구 교수는 “분단 65년이 된 시점에서 대체 무슨 짓인가. 내가 포함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명단을 살펴보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더라. 예를 들어 손호철 교수와 오세철 교수 같은 분을 친북인사라고 한 것만 봐도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그분들에 대해 알고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다”며 “보편타당한 기준도 정당성도 없는 작업으로 도무지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짓이라 보기 힘들다”며 일침을 가했다.
상당수 등재 인사들이 법적인 대응 부분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는데 반해 강 교수는 “저들이 이의신청을 받겠다고 하는데 너무도 뻔한 구색 갖추기 의도이기에 응하지 않겠다. 하지만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공동으로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손호철 교수는 “나는 평소 북한을 국민을 굶기면서 미사일이나 쏘고 세습까지 하는 세습군사왕조라고 비판하며 북한에 우호적인 일부 국내 운동권 역시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런데 나보고 친북인사라니 어이가 없다. 나뿐 아니라 이번에 선정된 100명 중에는 친북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손 교수는 자신이 등재된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없지만 아마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으로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등을 주도해 왔고 여러 글을 통해 냉전적 보수세력을 비판해왔기 때문이 아니겠나”라는 의견을 밝혔다.
종교계에서는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와 김민웅 목사(성공회대 교수), 김상근 목사(6·15공동위남측위원장), 수경 스님, 진관 스님(불교인권위원장) 등이 등재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은 “이번 일에 대한 함 신부님의 자세한 의향은 알 수 없지만 특별한 언급은 없으셨던 걸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수경 스님은 “황당스럽다. 친북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친북인사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법적인 대응은 물론 일절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라고 답변했다.
이처럼 기자가 확인한 대부분의 1차 명단 수록자들은 ‘무시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까지 무대응 입장을 고수할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올 8월 중에 200명의 2차 명단이 추가로 발표되고, 여기에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포함될 경우 사태는 집단 대응 및 줄소송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