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령관 송요찬 장군. | ||
유명한 일화도 있다. 1952년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전쟁의 최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밴 플리트(Van Fleet)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수도사단을 방문했다. 이때 브리핑을 하던 송 장군은 영어로 “Go, Go, Go”라고 북진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미국 <타임>이 보도할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됐다.
송 장군은 이후 미육군 참모대학과 3군단장을 거쳐, 1957년 원주의 1군사령관이 되어 야전군 4개 군단을 지휘하며 한국방어 전선을 지켰다. 이어 1959년 2월 육군참모총장에 취임, 그는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단행해 군의 기획·관리 제도를 확립했다. 튼실한 한국군의 토대를 닦은 송 장군의 숙군 작업은 1군사령관 시절 정전 후 한국군의 수많은 문제를 직접 확인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하에 이룩한 것이지만 송 장군이 없었으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미8군과는 절대 신임 속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것도 미국 <타임>에 기사화됐다. 이때 숙군은 이규광 헌병사령관 조사해온 내용을 나와 이 사령관이 영문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경무대에 올려 승인이 나면 시행했다. 일부 구속도 있었지만 대부분 권고사임시켰다.
1군사령부 때 당시 <코리언리퍼블릭(Korean Repulic·현 코리아헤럴드)>이라는 영자신문 1페이지에 제1군의 완벽한 방어태세에 대해 내가 쓴 글이 크게 나왔다. 이때는 이승만 박사가 다른 신문보다 영자지인 <코리언리퍼블릭>을 즐겨 읽을 때였다. 송 사령관이 놀랐고, 나는 거기서 신망을 얻어 향후 육군참모총장실까지 송 장군을 따라갈 수 있었던 같다. 1군사령부 시절 필자는 야전연습 때 통역을 도맡았다. 김정일 국방장관, 덱커(Decker) 대장, 백선엽 대장 등이 수없이 왔고, 이승만 박사도 꼭 참석해 한국말뿐 아니라 영어로 직접 축사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야전 연습으로 군사령부가 전방에 있는데 라디오로 올림픽중계 방송을 듣다가 송 사령관에게 혼난 적도 있다(개인적으로 젊은 시절부터 워낙 스포츠를 좋아했다). 얼마나 크게 혼났던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만큼 송 장군은 잘못하면 용서가 없었다.
송요찬 참모총장 시절인 1960년 4월19일에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송 참모총장은 경무대 앞 발포사건이 오전 11시에 일어난 후 수습이 안 되자 오후 3시에 경무대로 불려 올라갔다. 비상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송 총장은 계엄령을 오전 11시로 소급 발령하려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오후 3시로 결정이 났다. 당시만 해도 서슬이 퍼렇던 경무대의 뜻에 반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강단이 대단했다. 어쨌든 이로써 내각은 총사퇴하고, 경무대와 계엄사령관이라는 새로운 명령계통이 서게 됐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까닭에 군 지휘관은 모두 전쟁 때 용맹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또 미군의 경제원조, 군사원조로 나라가 지탱되었고, 작전지휘권도 미8군에 있었다. 한국경제는 막 본격적인 부흥과정에 들어서던 때로 우스갯소리로 “한국에는 기업이 둘 있는데 하나는 육군이고, 하나는 교통부 강생회(홍익회의 전신)”라고 할 정도였다.
이때 육군참모총장은 송요찬, 연합참모의장은 백선엽, 1군사령관 유재흥, 2군사령관 장도영, 교육총감 최영희, 참모차장 김종오,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은 박정희였다. 워낙에 군의 비중이 높다보니 일부 쿠데타 논의가 있을 정도였다. 사실 서울에 현역 1개사단을 진입시키고 정보, 헌병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비상계엄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되돌아보면 육군본부에는 헌병중대와 본부사령부만 있을 뿐 실제로 전투병력은 없었다. 수색에 30, 33예비사단이 2000~3000명씩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믿을 수 없어 양평에 예비로 있던 전투사단인 15사단을 동원했다. 계엄령이 떨어질 때 조재미 준장이 15사단을 이끌고 상경한 것이 밤 8시쯤이었고, 곧 경복궁에 주둔시켰다. 며칠 후 조재미 사단장이 장병들이 춥고 배고프다고 해서 담요와 건빵, 그리고 특별비를 보냈다. 육군본부에서는 사단장 보조로 같은 육사 2기생인 이석봉 준장을 붙여주었다.
4·19 당시 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혹은 무작스럽게 강압 진압(무기 사용을 포함)을 했다면 일선 방어는 어떻게 되고 나라가 어떤 비참한 상태에 빠졌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아찔하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정말이지 군인의 본분을 제대로 지켰다. 당시 자유당은 계엄군이 치안을 장악한 후 경찰의 무력사용을 계획했던 것 같다. 육군에 칼빈총탄 10만 발을 요청해온 것이다. 하지만 송 장군은 이를 거절했다. 19일 아침 고려대에 집결한 데모대 1900명을 해산시키면서 “학생은 폭도가 아니다. 방화범을 제외하고는 전부 석방시켜라”라고 명했다. ‘군은 국민 편에 서고, 또 국가원수(대통령)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수습된 상태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킨 것이다.
▲ 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야전연습에서 훈육하는 모습(위). 1961년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 방한 때 필자는 의전을 담당했다. | ||
이승만 대통령이 부상당한 학생들 위문 차 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다녀왔다. 그리고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곧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퇴하고 모든 수습이 잘될 것이라고 기분 좋게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 보도국장 김병률 대령이 급히 달려왔다. 장면 부통령이 사퇴했다는 것이다. 아닐 것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틀림없는 장면 부통령의 사퇴였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이기붕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기자회견은 중단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조용했던 데모 군중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4월 25일 태평로에서 교수 데모가 시작되고, 일부 데모대가 칼 같은 무기를 준비한다는 소리까지 들여왔다. 태평로 의사당 앞에서 교수데모가 열린 후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국회연락장교 신원식 대령의 연락을 받고 총장실에 들어가니 송요찬 장군은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낮잠 휴식’ 중이었다. “큰일났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더니 “김종오 참모총장에게 알려”하고 다시 자버렸다. 그때 나는 송 장군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태평로는 밤 사이에 온통 대한민국이 무너지듯 시끄러웠다. 국회의장 공관에서는 이강석 소위가 계속 병력 1개 중대만 보내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상황실에 보고하면 “보냈다고 하라”는 답이 나왔다. 전화통화를 할 때는 시위대의 함성이 들리곤 했다. 이미 군은 대통령만 보호하고 이기붕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이기붕 일가는 포천에 있는 부대로 다시 찾아갔는데 비호를 받지 못했다. 이승만 박사 하야 후 육군총장실에 이강석 소위(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가 아무 말 없이 악수만 한 사람씩 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 가족들이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참모총장이 숨겨놓았다는 보도가 있어 총장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경무대관사로 기자들과 검시를 하러갔다. 정치무상이었다. 후에 들으니 하와이로 보내려고 미측에서 찾았는데 찾기 전에 자살해 버렸던 것이다.
4월 26일 아침에 송요찬 사령관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께 마지막 건의를 했다. “발포 안 하면 수습이 안 됩니다”고(일종의 협박 아닌 협박). 그 말을 듣고 이승만 박사는 “발포는 안 돼, 국민이 무엇을 원해?”라고 물었고, “하야하시랍니다”는 말에 “그럼 하야하지”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하야 성명발표가 나온 것이다. 이때는 페퍼포그 등은 없었다. 육군공병감 엄홍섭 장군에게 지시해 이화장을 수리하고 곧 이 박사는 그리로 옮겼다가 하와이로 떠났다.
이때 계엄사령관실(참모총장실)에는 필자가 수석부관이고, 내근에 김성진 대위(육사 11기 수석-후에 체신,과학장관)와 수행 이병관 대위(12기 수석-소장으로 사망)가 있었다. 흐르는 역사는 움직인다. 한 가지 잘못하면 역사가 바뀌는 것이다.
4·19가 수습된 후 허정 내각이 들어섰고, 송 장군은 참의원 출마설도 있었지만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으로 갔다. 거기에는 정일권, 최영희, 최경록 장군 등도 있었다. 얼마 안 가 5·16군사혁명이 일어났고, 유일하게 5·16혁명 저지성명을 워싱턴에서 발표한 송 장군은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던 터인지 최고회의에서 불러들여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곧이어 장도영 내각 실각 후 내각수반으로 가고 외무장관, 경제기획원 장관을 두루 거치고 경제기회원 장관 겸직 때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돼 울산공업단지 선정에 기여했다.
송 장관은 내각수반으로 한미관계강화와 군사 및 경제 원조, 외국투자유치에 주력하다가 4대 의혹사건이 정권 내에 터지자 박정희 의장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해버렸다. 그때 사임발표를 하면서 박정희 의장은 송 장군의 공적을 가리켜 “청사에 빛나리라”고 했다. 송요찬과 군사정권과의 충돌은 박 의장과의 충돌이 아니고 군사정권 실세, 즉 ‘젊은 주체’들과의 의견충돌이었다. 송요찬 장군은 1962년 1월 2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성명문에서 “군은 민정이양을 하고 본래 의무에 돌아가라, 군사정부에 바란다”고 말했다.
군사정부는 눈엣가시 같은 송 장군을 구속 수감했고 나도 외국시찰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후 밤에 귀가했다.
송요찬 장군은 자민당 대통령 후보로 옥중에서 출마했으나 곧 사퇴했고 병에 걸려 오래 고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인천제철을 맡아 지병치료로 시간을 보내면서 고생하다가 1980년 시카고 병원에서 뇌수술을 하고 62세에 타계했다. 한국에서 치료 중에는 인공혈액 ‘알버민’이 필요해 필자가 미국에 주문하여 가져다 주곤 했다. 장례식은 육군장으로 치러졌는데 나는 외국 출장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그 후 2000년에 전쟁박물관에서 열린 ‘12월의 호국인물 송요찬장군’ 행사에 가족과 전우들의 요청으로 참석해 기념사를 했다.
내가 아는 장군 송요찬은 지금도 보기 드문 참 군인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전선에서 몸을 바쳤고 국민과 나라를 사랑한 무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청년시절에 걸어가야 할 인생길의 이정표를 제시해준 거인 중의 한 사람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