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수수 의혹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후 법원을 나서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법원의 무죄 판결로 족쇄를 푼 한 전 총리는 서울시장 후보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는 동시에 민주당과 함께 ‘이명박 정권 심판론’에 올인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반면 궁지에 몰린 검찰과 사정당국은 비판 여론을 예의주시하면서 반전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 검찰이 1심 선고 하루 전(4월 8일) 한 전 총리가 불법정치자금 10억 원을 수수했다는 추가 혐의를 터뜨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야권 일각에서는 청와대 핵심부가 청와대 민정팀을 정점으로 검찰과 사정기관에 ‘한명숙 죽이기’ 밀명을 내렸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1심 법원은 한 전 총리의 손을 들어줬지만 2라운드로 치닫고 있는 검찰과 한 전 총리 간의 사활을 건 전면전을 심층취재했다.
검찰과 한 전 총리 간의 진검승부 1라운드는 한 전 총리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심 법원이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형두 부장판사)는 4월 9일 선고 공판에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줬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한 전 총리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12월 22일 검찰이 한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한 이후 100일 넘게 진행된 1심 재판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법원의 무죄 판결에 한 전 총리 측과 검찰은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다. 법원의 무죄 판결로 족쇄를 푼 한 전 총리는 서울시장 후보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설 방침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 전 총리 측과 민주당은 무죄 판결을 계기로 현 정권과 ‘정치 검찰’의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및 표적·기획수사를 부각시켜 ‘이명박 정권 심판론’에 불을 지필 태세다.
한 전 총리는 무죄 판결 직후 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시는 나처럼 억울하게 정치공작을 당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 국민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싸워 승리하겠다”며 6월 지방선거에 올인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가 무죄 판결 다음날(4월 10일)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미망인인 이희호·권양숙 여사를 각각 예방한 배경에는 진보·개혁 세력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6월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겠다는 나름의 선거전 포석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민주당은 한 전 총리를 겨냥한 별건수사는 전형적인 ‘보복수사’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하고, 현재 정치권에서 추진중인 ‘검찰 개혁’ 카드로 정면 돌파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법원의 무죄 판결로 한 전 총리는 서울시장 선거전에 날개를 달게 됐고,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기치로 내건 민주당 또한 선거 정국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 검찰과 여권은 사면초가의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특히 ‘한명숙 유죄’에 사활을 걸었던 검찰은 ‘권력의 시녀’ ‘정치 검찰’이란 비판 여론에 직면하면서 극심한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 야당은 물론 여권 일부에서조차 검찰이 야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를 무리하게 기소한 게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일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한명숙 수사팀’에 대한 문책론 및 수뇌부 책임론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다. 항소심 재판이 남아 있는 상태고, 한 전 총리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정황을 새롭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뇌물수수 사건은 중앙지검 특수2부가 담당했지만 정치자금 사건은 특부1부가 맡고 있다. 검찰이 ‘한명숙 사건’에 그야말로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특수1부는 1심 선고 하루 전날인 4월 8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에 소재한 건설 시행사인 H 사 본사와 이 회사 회계를 담당한 모 회계법인 등에 대해 전격적으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검찰은 또 이날 H 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무실 1~2곳에 대해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검찰은 한 전 총리가 H 사로부터 수억 원대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황을 잡고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1부는 H 사와 한 전 총리가 정치자금을 주고받는 데 핵심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한 전 총리의 최측근 김 아무개 씨(여) 소환 등 불법 정치자금 수사를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검찰은 김 씨가 한 전 총리에게 사실상 ‘집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로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H 사의 전 대표 한 아무개 씨(수감 중)와 회사 측이 한 전 총리에게 9억여 원의 정치자금을 대부분 현금과 달러로 전달했고, 이 모든 과정에 김 씨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김 씨와 관련자들을 상대로 한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뒤 증거가 확보되면 한 전 총리도 소환조사한다는 방침이다.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에 관계없이 한 전 총리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정황이 포착된 만큼 그에 대한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법원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한 전 총리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배경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하고 있고, 검찰이 다시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특수부를 총동원해 ‘한명숙 흠집내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게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야권 일각에서는 청와대 핵심부가 검찰과 사정기관에 이른바 ‘한명숙 죽이기’ 밀명을 내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 4월 9일 기자와 통화한 사정기관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 전 총리는 서울시장 선거는 물론 6월 지방선거 판세를 좌우하는 메가톤급 핵뇌관으로 부상한 상태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한 전 총리가 선거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경우 여권은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고 전제한 뒤 “청와대 핵심부가 민정팀을 정점으로 검찰과 사정기관에 한 전 총리와 관련된 비리 의혹에 대해 저인망식 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1심 무죄판결로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는 한 전 총리와 새로운 비리 정황을 잡고 대반전을 노리고 있는 검찰. 이들 간에 펼쳐지는 2차 서바이벌 게임이 6월 지방선거 정국을 달구는 새로운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한 전 총리는 이번에도 검찰의 칼날을 비껴갈 수 있을 것인가.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