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개입’ 논란의 핵심 인물인 정윤회 씨가 11일 밤 고소인 자격으로 검찰의 고강도 조사를 마치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을 나서던 중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계파 갈등이 정점을 찍은 모습이다. 내부 단속이 적시에 이뤄지지 않으면 속에서부터 곪아 들어갈 것이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친이계가 최근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잦은 회동을 갖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친이계 좌장 격인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권력구조 개편과 헌법 개정’ 토론회에 축사하러 나와서는 작심발언을 이어갔다. “제왕적 대통령제 적폐의 결정판”이라는 표현을 썼고, “박 대통령이 옛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 그중에서도 유신독재 권력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이 의원은 또 “사람이라면 적어도 사실 여부를 떠나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는 해야 한다. 정윤회 씨도 검찰청 앞에서 ‘불장난’ 운운했는데 그에 앞서 ‘사실 여부를 떠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해야 했다. 이 정부는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이계는 새누리당 지도부가 청와대만 바라보며 자원외교 국정조사 실시를 야당과 합의한 것을 두고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연내에 못 박아 비선실세 의혹을 덮으려 한다며 지도부를 겨눈다. 일촉즉발 상황이다. 4대강 사업 국정조사까지 합의되면 ‘분당’을 각오할 수준의 내홍이 예고된다고 전한 정치권 인사도 있었다.
‘내란’은 계파 갈등만이 아니다. 범친박계에서도 비선실세 의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정황상 증거, 심정적 동의가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임시국회 긴급현안질의 ‘구인난’이다.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결국에 이번 질의는 박 대통령 방패막이하라는 것 아니냐. 그런데 우리 측 논리가 너무 빈약하다”며 “찌라시 수준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것은 아닌 땐 굴뚝에 연기나겠느냐고 다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질 대로 커지고 있는데 모두 입을 꾹 닫고 먼 산만 쳐다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앞서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긴급현안질의 신청자를 받았는데 이학재 의원을 빼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재직 시절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러자 김 수석부대표는 공개석상에서 “만약 끝내 신청자가 없을 경우 강제로 의정활동을 잘하신 의원님들 위주로 배정할 예정이다”고까지 했다. 방패막이를 자처하지 않으면 아무나 차출한다는 으름장이었다. 결국 신청자 10명을 억지로 끼워 맞췄다는 후문이다.
여권의 한 정보통은 “정윤회 씨 파문에 여권이 속수무책인 것은 실체 없는 그간의 각종 설이 너무 오래 이어져왔고, 그 과정에서 살이 붙고 옷을 입히며 확대된 탓이 크다. 사직동팀, 삼성동팀 등을 정 씨가 지휘했고 인사 개입설에다가 (얼굴이 알려지지 않게) 헬멧을 쓰고 강남을 누비고 있다는 둥 각종 말이 말들을 낳았다”며 “왜 다들 ‘올 것이 왔다’며 손 놓고 있겠는가. 지금까지의 소문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한번 지켜보자는 공감대가 의도치 않게 형성돼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고위 당직자실의 한 관계자는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께 사과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시는 지지자들이 많이 계시다. 대통령도 그렇고 정윤회 씨도 해명하기 전에 국정이 마비된 데 대해 자기 탓을 해야 한다”며 “찌라시라는 단어는 대통령의 격과 맞지 않았고, 불장난이라는 정 씨의 표현도 이 정도 수준의 사건에서 적절치 않았다는 지적을 많이 듣고 있다”고 전했다.
긴급현안질의 신청을 하려다 그만둔 새누리당 초선 의원은 “현안질의가 쉽지 않은 이유는 내부의 적들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유진룡 전 장관만 해도 박 대통령이 직접 문화부 국·과장이 ‘나쁜 사람’이라며 교체를 지시했다고 폭로하지 않았느냐”며 “이명박 전 대통령 때 사람이 싫어서 그 전 정권 사람들을 데려다 썼는데 그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 이건 어디서 뭐가 어떻게 터질지 모르니 원…”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세도 거세다. 이참에 여의도 정치의 주도권을 쥐겠다며 사생결단 양상이다. 이번 긴급현안질의도 신청자가 너무 많아 선착순 마감했다는 말도 떠돈다. 정보기관 한 관계자는 “(정윤회 관련) 제보가 야당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삭줍기만 해도 선방을 날릴 수 있는 사안이어서 모두 히트작을 벼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가에서는 새누리당이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성사하는 대가로 자원외교 국정조사를 받아들였다는 음모론이 판친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은 두 사안 간 ‘딜(Deal)’은 없다고 못 박았다. 비선실세 의혹을 덮고자 이런 음모론이 등장했다는 것인데 이 음모론이 여권에서부터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말기 증후군’ 징후 중 가장 큰 문제는 ‘할 말 못하는 지도부’에 대한 성토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산국회가 끝나고 박 대통령은 여당 지도부와 당 소속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을 청와대로 불러 점심을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이완구 원내대표는 ‘대통령 각하’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고 한다. “대한민국 참 어려운 날, 힘들게 이끌어 오시는 대통령 각하께 의원 여러분이 먼저 박수 한 번 보내주시죠”라는 식이다. 김무성 대표는 “대통령께서 법에 정해진 시간 내에 예산안을 통과시켰다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에서 오찬을 하시는데 너무나 당연한 일을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쑥스럽다”고 인사했다.
청와대에 납작 엎드린 지도부에 대한 성토는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수도권 재선 의원실 관계자는 “정권 출범 3년차로 접어들고 있다. 지금은 현안에 가장 강력한 동력을 걸 수 있는 ‘힘의 정점’ 기간인데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총선 못 치른다고 걱정하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회 끝나자마자 지역구로 달려가 비비는 의원들이 절대다수인 것도 이를 방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일단 좀 지켜봅시다”라고 말하는 의원들은 ‘올 연말’까지라는 조건을 붙인다. 필요하다면 청와대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