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청춘을 썩힐 뻔했던 세 젊은이. 이들의 기구한 운명은 지난 2001년 10월30일 밤 시작됐다. 이날 동네 선후배 사이인 황씨와 이보성씨(가명ㆍ25)는 폭행혐의로 강원도 고성경찰서에 끌려왔다.
일이 꼬인 것은 두 사람의 폭행혐의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될 즈음. 경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이들의 여죄를 추궁했던 것이다. 경찰은 “이씨가 그러는데, 당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며 넌지시 황씨를 떠봤다. 별 뜻없이 물어본 경찰의 말에 당황한 황씨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내가 아니고 이보성이 사람을 죽였다”며 발끈한 것이다. 황씨의 답변에 경찰도 놀랐다. 의외의 ‘수확’을 거둔 경찰은 11월2일 곧바로 황씨를 상대로 다음 내용의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2000년 6월께 이보성과 함께 속초 H콘도 별관의 한 객실에 가서 투숙객인 40대 초반 남자를 불러내 옥상으로 갔다. 이보성이 ‘빌린 돈 2백만원을 갚으라’고 하는데도 남자가 불응하자 마구 때린 뒤 옥상 아래로 떨어뜨려 살해했다. 사체는 쌀자루에 넣어 부근 공동묘지에 암매장했다.”
경찰은 이어 ‘공범’ 이씨의 범행을 추궁했다. 난데없는 살인혐의에 황당해하던 이씨 역시 황씨의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진술조서를 들이대자 그만 범행을 시인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진술을 토대로 공동묘지로 출동한 경찰은 이들이 지목한 지점에서 문제의 사체를 곧바로 발견하진 못했다. 그런데 공동묘지 수색이 열흘을 넘긴 11월18일. 공교롭게도 경찰은 애초에 피의자들이 지목한 지점 부근에서 마대에 쌓인 변사체 한 구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경찰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또 다른 공범으로 지목된 방문식씨(가명ㆍ28)도 검거했다. 피의자들의 자백에 사체까지 확보한 경찰은 이들을 춘천지검 속초지청으로 송치했고, 검찰은 같은 해 12월 이들 세 명을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결국 강도살인 혐의로 법정까지 가게 된 세 사람. 공판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경찰이나 검찰에서 보인 태도와 달리 살인 혐의에 대해 의외로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춘천지법 속초지원은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신문조서와 사체 발견사진, 사체검시에 대한 수사보고 등을 토대로 강도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를 인정했다.
그 결과 피고 이씨가 무기징역에, 황씨와 방씨는 각각 징역 20년과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전봉진)는 경찰과 검찰이 제시한 부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들의 증언과 증거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재판부는 우선 범행일시에 대해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 결과를 뒤엎었다. 애초 경찰은 이들의 범행시기를 2000년 6월께로 추정했다. 이 부분은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면서 일 년 뒤인 2001년 7월로 미뤄졌다.
2000년 6월은 이들 셋 모두가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기에 범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2001년 7월이라는 검찰의 범행일시에 대한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발견된 사체의 상태가 문제였다.
사체는 발견 당시 이미 뼈만 남은 ‘백골화’ 상태. 통상 사체가 백골화에 이르는 시간은 흙 속에서 3∼5년 정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따라서 2001년 7월에 사망한 사체가 같은 해 11월18일에 백골화됐다는 점은 말이 안되는 것이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모호한 범행동기도 피고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검찰 조사 결과 이들의 범행동기는 ‘유흥비 마련’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흥비 마련 목적으로 강도를 모의할 경우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고 순찰직원 및 근무요원이 곧바로 달려올 수 있는 콘도 객실을 범행장소로 삼는다는 것은 경험칙에 반한다”며 검찰의 주장을 반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범행에 대한 자백이 경찰 검찰을 거치며 그때그때 수정되거나 추가되고 있는 점을 근거로 그 신빙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피고 황씨가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고, 이씨는 정신장애로 군에서 의가사 제대한 점, 방씨 또한 정신지체 장애로 정신연령은 6∼9세 수준에 불과한 상태라는 점 등도 참고가 됐다.
결국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학력이나 경력, 생활환경 등에 미루어 자포자기 끝에 허위 자백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피고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1년 넘게 세 명의 젊은이들을 짓누르고 있던 살인의 누명은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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