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촤근 <살인의 추억>이란 제목의 영화로 재현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주연으로 열연한 배우 송강호. | ||
이같은 범행은 지난 86년 9월부터 91년 4월까지 6년에 걸쳐 모두 10차례나 계속됐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 수사를 위해 경찰은 당시 연인원 1백80만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마을주민을 포함해 모두 1만8천명의 용의자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자의 실체는 유일하게 범인이 검거된 8차 사건을 제외하곤 아직까지도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범인이 한 사람인지, 여럿인지조차도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다만 살해 후 음부에 난행을 빠트리지 않았던 점을 근거로 범인이 성도착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 아홉 번째 희생자 몸에 묻은 정액에서 B형의 혈액형이 검출된 것 정도가 추가 단서가 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미제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최근 ‘살인의 추억’이란 영화로 재구성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경기도 화성을 찾아가봤다.
지난 4월2일 오후8시께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마을회관 뒤 야산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에서 귀가하던 16세 여고생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성폭행당한 사건이었다. 겁에 질린 여고생을 흉기로 위협해 욕심을 채운 범인은 범행 후 피해자의 음부에 참나무잎 두 움큼을 삽입하는 도착증세를 보인 뒤 유유히 사라졌다.
다행히 경찰은 사건 현장을 목격한 피해자 아버지의 신고로 범행 현장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피의자를 검거할 수 있었다. 피의자는 우정파출소를 거쳐 화성경찰서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에 넘겨졌다.
수사본부 관계자들은 피해자를 통해 성폭행 사실과 피의자가 보여준 도착증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순간 수사본부 관계자들의 맥박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피의자의 혈액 샘플 채취를 서둘렀다. 초조하게 감정결과를 기다리던 수사본부 관계자들.
1차 사건 때부터 자그마치 17년을 끌어온 수사였다. 범인만 검거한다면 출세는 따논 당상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상처 입은 경찰 자존심의 회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의 단편이 머릿속에서 뒤엉킬 무렵 혈액 검사결과가 나왔다.
‘피의자 혈액형 O형’. 곧이어 신원조회 결과 나이가 29세라는 결과도 나왔다. 17년 전이면 12세 소년에 불과했다는 계산이 쉽게 성립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결과를 기다리던 수사본부로서는 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최근 수사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10차 사건이 벌어진 지 13년이 지난 지금, 경찰이 할 수 있는 수사활동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사본부 관계자의 말.
“일단 피해자 가족부터가 수사협조를 꺼린다. 좋지 않은 기억을 자꾸 건드린다고. 지금 화성에 남아 있는 유가족도 거의 없다. 범행 현장도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대부분 사라진 지 오래다.”
이 관계자의 푸념처럼 희미한 단서와 6명(경찰서장 등 지휘부 2명 포함)의 단출한 인원으로 축소된 수사본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시 연쇄살인이 발생했던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발생하는 사건 가운데 동일수법이 사용됐을 경우 여죄를 추궁하는 정도다.
수사본부가 지난 4월22일을 기준으로 작성한 ‘화성 살인사건 수사현황’ 보고서에 나타난 주요 용의자 6명에 대한 수사도 대개 이런 방식에 의존했다. 이 보고서에는 최근 7∼8년 사이 용의자로 지목된 6명에 대한 조사결과가 기록돼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약 7년전 양평군에 있는 한 절의 주지스님 이아무개씨에 대한 제보에서 시작됐다. 사건이 진행되던 80년대 말 화성군 태안읍에 살았던 이씨가 화성사건 범인이 틀림없다는 제보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혈액형 또한 A형이었다.
나머지 5건 가운데, 앞서 소개한 성폭행 사건을 제외한 4건은 지난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화성시 일대에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키거나 성도착 증세를 보인 단순 성도착자로 인해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또 이들 모두 범인의 혈액형으로 추정되는 B형이 아니었다.
이렇듯 경찰의 수사가 답보 상태에 빠져있는 사이 연쇄살인이 발생하던 80년대 말만 해도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하던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읍 일대는 90년대 재개발 붐을 타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공장이 들어선 상태. 이제 사건 현장은 수사본부에 보관해둔 현장부근 약도와 사진 몇 장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연쇄살인사건의 범주에 포함되는 사건 가운데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것은 제9차, 10차 사건뿐이다. 마지막 10차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13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 경찰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정확히 3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