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지법 제3형사부(재판장 최인석 부장판사)는 지난 9일 지난해 경남 창원 일대에서 경찰의 수사를 피해다니면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일삼은 방영훈군(가명·17·고교2년)에 대해 강제추행살인죄를 적용해 이 같은 중형을 선고했다.
방군은 지난해 3월 창원시 도계동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가려는 6세 여아를 쫓아가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 또 방군은 지난해 12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5명의 부녀자를 성폭행하거나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방군의 사건 파일을 넘기면 법원도 관용을 베풀지 않을 만큼 잔인했고, 파렴치했다.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지난해 3월 하순 경남 창원. 창원 서부경찰서에는 다급한 목소리의 신고가 접수됐다. 경남 창원시 도계동 한 빌라 지하에서 6세 여아의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였다.
현장에 출동한 서부경찰서 강력반 최아무개 반장은 끔찍한 광경에 차라리 고개를 돌렸다. 6세 남짓한 여아가 성폭행 당한 뒤 참혹하게 사망한 채로 버려져 있었던 것.
경찰은 다행히 현장 주변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콘돔 두 개를 발견했다. 경찰은 이 콘돔에서 채취한 정액을 일단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보내 감정을 의뢰했다. 이 콘돔은 이후 피의자 입증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사에 커다란 혼선을 초래하는 ‘애물단지’로도 작용하게 된다.
경찰서 사무실로 돌아온 최 반장은 희미한 증거를 바탕으로 고민을 거듭했다. 일단 콘돔이 두 개인 것으로 미루어 범인은 두 명일 수 있다는 단순한 결론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단독범이라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는 대상은 성적 능력이 왕성한 청소년이나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들로 제한됐다. 국과수에서도 감정 결과 두 개의 콘돔에서 각각 발견된 정액은 O형의 혈액형을 지닌 동일인의 것이라는 소견을 보내왔다.
이때부터 경찰은 경남 창원 일대의 청소년들과 정신질환자들, 그리고 혈기왕성한 군인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수사를 전개했다. 주로 사건 당일의 행적 조사와 혈액형 대조를 통해 수사대상을 압축하는 식이었다. 그 사이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 주변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부녀자 성폭행이 다시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6세 여아 성폭행 살해 사건’이 벌어진 지 두 달여쯤 지나서였다. 이때부터 범인은 숫제 경찰의 저인망식 수사를 비웃듯 눈깜짝할 새 성폭행을 반복하곤 사라졌다.
범인은 시간과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월드컵 경기가 한창 진행되던 오후에 여중생을 상대로 범행이 발생하기도 했고, 한밤중에 30대 가정주부를 상대로 일어나기도 했다. 또 대상이 여중생이나 초등학생 등 어려서 성폭행이 쉽지 않을 경우 변태적 성행위를 통해서라도 만족을 얻는 데 서슴지 않았다.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범행 대부분이 최초 범행이 발생했던 도계동 놀이터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
그 수법도 비슷했다. 놀이터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먹잇감’이 나타나면 조용히 따라간 뒤 아파트 현관이나 지하 창고 등에 이르면 느닷없이 뒤에서 목을 졸라 실신시키고 곧바로 성폭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당한 사람도 범인의 구체적인 인상착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수사를 맡은 경찰로서는 이가 갈릴 노릇이었다. 그 사이 경찰의 수사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단서 하나가 새롭게 나타났다. 다름아닌 성폭행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체액 감정결과. 어처구니없게도 이번에는 A형이었다. 애초 ‘6세 여아 성폭행 살해 사건’ 당시 용의선상에 올려놓았던 범인의 혈액형은 O형이었다.
그 내막은 이랬다. 최초 성폭행 살해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날씨가 푸근하던 지난해 3월 하순이었다. 사람 몸에서 배출된 정액은 며칠이 지나면 금세 부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주 극소량의 활용가능한 정액으로 혈액형을 읽어내다보니 AO형이었던 범인의 혈액형을 O형으로 판독해 버렸던 것.
경찰이 자신의 혈액형과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게다가 범인은 지난해 11월과 12월 연속으로 자신이 성폭행한 여성에게 얼굴을 보이는 ‘실수’를 하고 만다.
지난해 11월 여중생을 성폭행을 하기 직전 자신이 쫓아가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인 것이 본인의 부주의로 인한 실수라면, 12월 자신이 기절시킨 채 성폭행 하던 또다른 여중생이 범행 도중 갑작스럽게 눈을 뜬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피해 여중생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어 ‘범인은 호리호리한 체구에 검은색 안경과 파란색 운동복을 착용한 17세 고교생’이라고 정확히 지목해냈다. 이 덕분에 경찰은 지난 1월3일 범행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던 도계동 놀이터에서 또다른 범행대상을 쫓고 있던 당시 경남 K고 2년에 재학중이던 방군을 검거할 수 있었다.
검거 당시 방군은 역시 파란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음란 비디오 등을 자주 보면서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이 경찰에서 밝힌 방군의 범행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