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부모 만나서 늘 억울한 판정에도 항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울먹이던 자식들과 우리 제자들….”
2013년 5월 전 아무개 씨(47)는 태권도 선수인 아들이 편파판정으로 억울하게 패했다며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택했다. 해당 경기에서 전 씨의 아들은 상대방에게 5 대 1로 앞서다가 경기 종료 50초 전부터 심판에게 경고를 내리 7번이나 받으며 흔들렸고 결국 역전패를 당했다. 전 씨의 죽음으로 경기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 대대적인 승부조작 실체가 드러났다. 결국 협회 전무 김 아무개 씨와 심판 등 7명이 경찰에 입건됐다.
스포츠 비리 수사는 사실상 이 ‘유서 사건’으로 촉발됐다.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뒤,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직접 이 사건을 언급했다. 이후 문체부의 행보가 빨라졌다. 한 달 뒤에 정부의 체육정책을 담은 ‘스포츠비전 2018’이 발표됐고, 체육단체 감사계획이 잡혔다. 지난해 2월에는 ‘스포츠 4대악 신고센터’가 설치됐고, 이윽고 검경을 합동으로 ‘스포츠 4대악 합동수사반’이 발족됐다. 감사를 넘어 대대적인 수사를 하겠다는 의지가 피력된 셈이다.
합동수사반이 가동된 지 약 7개월, 문체부는 지난해 12월 28일 스포츠 비리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뚜껑을 살짝 열어 본 체육계 비리는 충격적이다. 공금 횡령 및 승부조작은 기본, 자금세탁, 유흥업소 접대까지 온갖 수법들이 드러났다.
비리가 대대적으로 드러난 곳은 ‘택견계’이다. 대한택견연맹회장이자 국민생활체육택견연합회장, 세계택견본부총사를 겸직해 사실상 국내 택견계를 장악하고 있던 이 아무개 전 회장(66)은 ‘13억 3000만여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 전 회장의 혐의는 ‘과도한 심판 수’에서 꼬리가 잡혔다. 택견연맹에 등록된 인원 현황에 따르면 선수는 1000여 명, 심판은 500여 명이다. 선수와 심판 비율이 2:1인 셈. 문체부 관계자는 “이전에 비해 심판 수가 과도하게 늘어난 점이 수상해 수사를 진행했더니 ‘수당 지급’ 비리가 나왔다”라고 전했다. 활동하지 않거나 경기진행에 참여한 적 없는 ‘유령 심판’들을 내세우고 심판 수당을 가로챘던 것.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이 동원한 차명계좌는 총 ‘63개’에 달했다. 연맹의 회계 담당은 이 전 회장의 처제가 맡아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은 감쪽같이 이뤄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전 회장은 자신이 실소유주인 업체로부터 현수막 등의 물품을 납품받은 것처럼 가장해 7000여만 원을 횡령하는 한편, 트로피 납품업체에게 트로피 대금을 부풀려 지급한 뒤 차액을 돌려받는 수법으로 수천만 원을 챙겼다. 이 전 회장은 횡령 금액을 고가 차량구입이나 자녀 유학자금, 생활비 등에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스포츠계 비리 수사 관계자는 “압수수색 당시 이 전 회장 개인 금고에서 달러, 현금 다발이 나왔다”라고 전했다.
이처럼 스포츠계 비리는 ‘횡령’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횡령은 앞서 이 전 회장의 사례와 같이 단체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 횡령과, 지자체 지원금을 횡령하는 수법으로 나뉜다. 특히 해외 전지훈련의 경우 횡령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지난 2013년 태권도 편파판정으로 인한 선수 부친 자살사건이 ‘스포츠 4대악’ 수사를 촉발했다. 사진은 기사내 특정사실과 무관함.
허위 세금계산서와 훈련보고서 등 허위 문서도 난무한다. 경기도 한 체육협회의 명예회장과 부회장은 허위 세금계산서를 만들어 도에서 지원한 운영비 ‘2400만 원’을 횡령해 검찰에 수사 의뢰됐다. 또 다른 체육협회의 순회코치 2명은 실제로 선수를 방문하여 지도하지 않고 허위 훈련보고서를 만들어, ‘4500만 원’의 훈련수당을 부정 수령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합동수사반 수사가 들어올 것을 예상해 협회의 모든 공문서를 파기한 체육단체 회장도 있다. 한 체육 중고연맹 회장은 지난 2012년까지 연맹이 생산한 모든 공문서를 고의로 파기한 사실이 적발됐다. 합동수사반 측은 “대규모의 공금횡령이 의심되는 대목”이라고 전했다.
스포츠계 고질적인 문제인 승부조작과 특례입학도 여전하다. 한 대학팀 유도 감독 B 씨는 전국중고연맹전에서 자신의 아들을 우승시키기 위해 상대팀 고교 지도자들에게 기권, 져주기 등 승부조작을 의뢰했다. 결국 아들이 우승하자 자신이 재직 중인 대학에 특례입학을 시키는 대범함을 보였다. 한 학부모는 자녀의 대학 특례입학을 위해 조교에게 입학실기시험지도 명목으로 1000만 원을 건네고, 유흥업소에서 지도교수를 접대하기도 했다.
스포츠계의 이러한 문제점은 스포츠계 특유의 고질적인 문화가 배경이 된다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단체장은 상하 관계가 철저한 체육계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대부’로 통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체육계 특유의 학연, 지연이 얽히기에 웬만한 횡령은 덮어두기 마련이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100만 원 단위 횡령은 셀 수도 없이 무수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스포츠계에 ‘메스’를 대대적으로 들이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워낙 고질적인 문제가 반복이 된 터라,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서강대 스포츠심리학 정용철 교수는 “스포츠 역량은 그동안 많이 성장했지만, 운영협회는 여전히 비리가 만연하는 등 후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워낙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문제라 이제는 자정작용을 기대하기에는 무리다.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할 때”라고 전했다.
한편 ‘스포츠 4대악’ 신고센터에 접수된 비리 269건 중 가장 많은 종목은 ‘태권도’(27건)로 나타났다. 그 다음은 축구(25건), 야구(24건), 복싱(18건) 등이 뒤를 이었다. 비리유형별 신고접수는 조직사유화가 113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승부조작 및 편파판정이 32건, 폭력 및 성폭력이 15건, 입시비리가 5건으로 나타났다. 문체부 관계자는 “접수된 사안 중 중간수사 발표를 제외하고 남은 수사를 계속해서 진행해 가는 상황”이라며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잠정적으로 올해 3월까지는 문체부와 경찰이 합동해서 수사를 하고 그 이후에는 경찰청 측이 수사를 전담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수박 겉핥기 수사’ 비판 왜? 269건 신고…검찰 송치는 달랑 2건 “50여 년간 쌓여온 체육계의 적폐를 해소해 나가겠다.” 문체부 김종 제2차관은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문체부 내부에서도 이번 스포츠 비리 수사가 역대 정권에서 이뤄지지 않았던 대대적인 개혁이라고 자화자찬 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체육계 인사들은 이번 수사를 “상당히 실망스럽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서강대 스포츠심리학 정용철 교수는 “이번 수사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중간발표에 실망을 했다는 체육계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높다. 청와대의 오더까지 받아서 진행한 수사치고는 굉장히 미진했고 앞으로도 별로 기대할 게 없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김종 문체부 제2차관. 연합뉴스 미진한 수사는 비리 건수에 대한 검찰 송치 건에서 드러난다. 그동안 합동수사반은 총 269건의 신고를 받아 118건에 대한 조사를 완료했다. 이중 검찰에 송치된 것은 2건, 검찰에 수사의뢰를 한 것은 2건에 불과하다. 문체부 관계자는 “검찰에 송치할 만큼의 사안이 없었다”라고 해명했지만, 좀 더 강력한 ‘처벌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윤회 비선실세’ 의혹으로 촉발된 승마협회 국가대표 선발 특혜 의혹도 마찬가지다. 문체부는 승마협회 비리를 10건 접수해, 그 중 6건은 종결하고 1건은 수사 의뢰, 4건은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리는 횡령 등으로, 이 중 정윤회 씨와 관련된 비리 의혹은 수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 스포츠 4대악 척결의 총책임을 맡은 김종 제2차관 역시 정윤회 비선실세 의혹에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기에, 결국 ‘수박 겉핥기식’ 수사를 한 게 아니냐는 시선이 쏟아지기도 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정윤회와 관련한 승마협회 의혹들은 제보가 접수되지 않았다. 이번 스포츠 4대악 수사는 오로지 제보가 접수된 사안만 수사를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문체부의 ‘휴일 기습발표’도 여전히 뒷말이 많다. 애초 합동수사반은 지난해 10월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지만, 12월로 미뤄졌다. 또 지난해 12월 28일 발표 역시 휴일인 일요일에 이뤄져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문체부 관계자는 “10월 수사 발표가 미뤄진 것은 제주전국체전을 앞두고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서였다”며 “일요일 발표도 여러 부처에 중요한 발표들이 많아 잡은 것”이라고 전했다.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