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김여사’의 황당한 횡단보도 운전, 교통 사고 현장, 삼단봉으로 상대방의 차량을 파손한 일명 ‘삼단봉 사건’. 사진출처=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
무엇보다 ‘교통사고는 목소리만 크면 장땡’이라는 말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만들었다.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뒷목을 붙잡고 내리는 운전자가 상대 차량의 블랙박스를 보고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이제 지겨울 정도다.
블랙박스는 얌체 운전자들에게도 ‘공공의 적’이 됐다. 국민신문고나 경찰청 사이트에 교통법규 위반 차량 처리를 위한 민원이 2011년 6만 9157건에서 2013년 25만 3759건으로 급증했다. 여기에는 갓길을 주행하는 운전자, 고속도로에서 불법 쓰레기 투기를 하는 운전자, 위험천만한 보복운전을 행하는 운전자 등을 담은 블랙박스 영상이 증거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통사고뿐만 아니라 범죄현장에서도 훌륭한 목격자 역할을 한다. 주차된 차량은 두 말할 것 없고 주행 중 찍힌 ‘1초’가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중요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발생한 ‘부산 고부 살인사건’도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아 수사에 난항을 겪었지만 현장 부근을 지나는 차량 2500여 대의 블랙박스를 정밀 분석한 끝에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었다.
음지에서 벌어지는 불법현장을 묵묵히 기록해 ‘정의의 사도’로 변신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 세무조사를 앞둔 한 코스닥상장업체 임원은 택시를 타고선 다른 임원과 전화통화를 했다. “세무 공무원 접대를 잘 끝냈다”, “세무조사는 걱정 말자” 등 누가 들어도 불법 로비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모든 통화내용을 듣게 된 택시기사는 비리 공무원을 조사해 달라며 경찰에 블랙박스를 넘겼는데 조사 결과 중부지방국세청 세무공무원이 청탁의 대가로 20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확인돼 구속됐다. 로비 현장에는 어떤 목격자나 증거도 없었지만 예상치 못한 블랙박스가 세무공무원과 문제의 임원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자동차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기록하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역할도 수행해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불륜의 증거’다. 지난 2013년 12월 울산에 거주하는 이 아무개 씨(38)는 남의 차량에서 시가 30만 원 상당의 블랙박스를 훔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그런데 이 씨가 블랙박스를 훔친 데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다.
사건 당일 이 씨는 아내가 낯선 남성 김 아무개 씨(34)의 차에 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곤 불륜 현장을 잡기 위해 추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김 씨는 차에 이 씨를 매달고 달리는 등 위험천만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투’ 끝에 김 씨는 차량을 버리고 그대로 달아났으며 이 씨는 불륜을 증명하기 위해 블랙박스를 훔쳤다.
블랙박스에는 이 씨의 아내와 김 씨가 나눈 대화까지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이 씨가 길을 가로막자 김 씨는 “경찰에 신고하라”고 말했고 이에 이 씨의 아내가 경찰과 통화하는 목소리, 이 씨가 차량에 매달렸음에도 그의 아내는 김 씨에게 “달려라. 그냥 달려라”며 재촉하는 것까지 말이다. 화가 난 이 씨는 문제의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씨처럼 직접 현장을 목격하지 않아도 블랙박스로 인해 뒤늦게 불륜이 들통 나는 경우도 있다. 사고로 인한 확인, 메모리 정리, 업데이트 등의 이유로 블랙박스를 점검하다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이와 모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내부 음성이 지원되는 블랙박스의 경우 배우자의 ‘신음소리’를 듣곤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본인의 블랙박스만이 아니다. 회사 주차장에서 밀회를 즐기던 남녀가 맞은편에 주차된 동료의 블랙박스에 찍히면서 징계를 받은 일도 있다.
블랙박스 영상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교묘히 활용해 홍보 수단으로 삼는 경우도 늘고 있다. 보통 블랙박스 영상이 화제가 되는 경로는 이렇다. 일반인이 자신의 블랙박스 영상을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 등에 올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오르거나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그런데 홍보용은 마케팅회사 등이 의도적으로 블랙박스를 이용해 영상을 촬영한 뒤 마치 우연히 찍힌 것처럼 인터넷에 공개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
술에 취한 여성이 교통사고를 당하려는 찰나 인도로 ‘순간이동’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그랬다. 이 영상은 ‘블랙박스 만취녀’라는 제목으로 순식간에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영상은 게임회사의 홍보용 동영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제공=큐알온텍
현재 전국에는 대략 잡아 약 300만 대의 CCTV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다 블랙박스 또한 자동차 등록대수를 2000만 대로 잡았을 때 약 600만 개의(장착율 30%) 블랙박스가 전국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는 셈이다. 5000만 명의 인구를 엿보는 ‘카메라’가 1000만 대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사생활 침해 논란을 넘어 빅브라더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도 같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블랙박스 이런 부작용도 렌즈 돌리면 ‘차 안 몰카’ 차량용 블랙박스의 등장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보통 블랙박스는 교통사고 발생률을 줄여주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손해보험업계에서는 블랙박스 때문에 오히려 골머리를 앓고 있다. 보험사들은 처음 블랙박스가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사고에 대한 잘잘못을 가려 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설치 시 보험 할인혜택을 제공하는 등 보급 확대에 힘썼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블랙박스를 장착한 차량의 손해율(거둔 보험료 대비 지급한 보험금 비율)이 더 높았다. 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20대가 블랙박스 장착률도 높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나 블랙박스를 믿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사고를 일부러 발생시켜 보험금을 타내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 자신의 과실이 아닐 경우 사고를 피하려거나 주의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쨌든 블랙박스가 기대했던 역할을 해내지 못하자 보험사들은 최근 할인혜택을 축소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눈을 감을 줄 모르는 블랙박스로 인한 부작용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블랙박스가 몰래카메라로 사용되는 점이다. 차량 내부를 찍을 수 있도록 방향 조절만 하면 깨끗한 화질에 음성까지 녹음될 뿐만 아니라 의심받을 일도 적기 때문이다. 이미 인터넷에서도 블랙박스를 이용한 몰래카메라 방법을 묻는 질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실제 블랙박스를 악용해 연인과의 성관계 모습을 몰래 촬영한 뒤 불법으로 유포하거나 협박에 사용한 사례도 적발됐다. 12월 3일 결별을 요구하는 내연녀를 감금·폭행하고 성관계 장면을 몰래 녹화해 유포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조 아무개 씨(45)도 범행에 블랙박스를 이용했다. 조 씨는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승용차에서 블랙박스로 내연녀와의 성관계 장면을 촬영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촬영한 것도 문제지만 이후 내연녀가 이별선언을 하자 영상을 캡처한 사진을 지인들에게까지 전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개인적인 영역뿐 아니라 공적인 부분에서도 문제가 된다. 고의든 아니든 블랙박스 영상이 보안의 구멍이 될 때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 보안이 필요한 사진촬영 금지구역을 활보하는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일일이 단속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군은 예비군훈련, 공사, 행사 등의 이유로 외부차량의 출입이 잦은데 블랙박스에 대한 단속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때론 블랙박스가 연인 혹은 부부사이를 갈라놓는 훼방꾼이 되기도 한다. 한창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20대 주부 박 아무개 씨(여·28)도 뜻하지 않게 블랙박스로 인해 부부싸움을 했다. 박 씨는 “임신을 하면서 남편이 새로 차를 구입해 블랙박스를 선물하려 했다. 그런데 남편이 다짜고짜 자길 믿지 못하는 거냐며 화를 내더라. 알고 보니 아내들이 남편 감시용으로 블랙박스를 많이 설치한다는 소릴 듣고 그러는 거였다. 서로 자길 믿지 못한다며 말다툼을 하다 감정이 상해 한 달 넘게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씨의 사례처럼 블랙박스를 배우자 감시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카센터를 운영하는 김 아무개 씨(34)는 “가끔 사모님들이 남편 차를 끌고 와선 블랙박스 영상 보여 달라는 경우가 있다. 백발백중 남편의 불륜을 의심해서다. 그런데 막상 블랙박스를 보면 아무 것도 없을 때가 더 많다”며 “반면 남자들은 블랙박스 영상 삭제법을 많이 물으러 온다. 손바닥보다 작은 기계 때문에 쩔쩔 매는 사람들을 보면 참 웃기다가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
‘사건사고 현장’ 손쉬운 제보 방법 ‘목격자 찾습니다’ 앱 설치하세요~ 스마트폰에서 ‘목격자를 찾습니다’ 애플리케이션(앱)만 설치하면 별도의 회원가입 없이 익명으로 시민이 직접 영상을 전송할 수 있다. 이렇게 제보된 영상은 경찰이 수사에 활용하게 된다. 이 앱은 거리 곳곳에 붙은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는 플래카드를 보고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제보를 받는다면 피해자의 안타까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한 시민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한편 경찰청은 뺑소니 교통사고 외에 4대 사회악 범죄, 현상수배범이나 강력 범죄사건에 대한 제보코너를 추가했다. 긴급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제보 시 112와 119에도 신고 되도록 했다. 제보된 사진과 동영상 정보는 경찰청 내 교통사고처리시스템(TCS) 및 형사사법통합시스템(KICS)과 연계돼 정보 분석을 거쳐 범죄사건 등을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제보자에게는 행정처분 감면, 보험료 할인 등을 제공할 계획이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