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리턴’ 사태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12월 17일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서부지검에 출석하는 모습. 일각에선 조 전 부사장의 구속기소와 관련 “지나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런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검찰은 사건 초기부터 “반드시 구속 수사를 하겠다”며 엄단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실제 국토부의 고발이 접수되자마자 강도 높은 조사 끝에 조 전 부사장까지 구속시켜버렸다. 검찰 내부에서는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다”며 공분 분위기가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벌가를 직접 겨냥한 수사라 조심스러울 것이란 예상과 달리 대검에서도 적극 수사를 지원했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사람을 무릎까지 꿇리면서 ‘갑질’을 했다는 점에서 검사들이 상당히 분개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이 이 정도로 확대될 수사가 아니었는데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건의 특성이 워낙 특이해서 비교 대상이랄 것은 없지만 혐의 자체만으로 보면 구속 수사에 여 아무개 대한항공 상무(58)와 김 아무개 국토부 조사관(55) 등 줄줄이 기소까지 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객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운항 상태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조 전 부사장이 오너의 지위를 이용해 기내 법질서를 무력화했고 직원들을 통해 조직적 은폐를 시도하는 등 죄질이 나쁘다”며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대검의 한 부장검사급 검사는 “이런 ‘일반적이지 못한’ 상황을 만든 것 자체가 재벌 오너 일가의 비상식적 수준을 보여준 것 아니냐”며 “수사 검사들이 ‘괘씸죄’까지 더해 더 엄격하게 혐의를 적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검찰의 ‘괘씸죄’ 적용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집권 3년차를 맞은 박근혜 정부가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면서 대기업을 겨냥한 수사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다른 방향으로 ‘재벌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2013년 채동욱 전 검찰총장 재임 당시 검찰이 대기업들을 잇달아 수사하면서 위세를 떨쳤던 것에 비해 김진태 검찰총장으로 바뀐 뒤인 지난해는 재벌 수사가 최소한에 그쳤다. 본격적인 수사는 아니더라도 재벌을 견제할 시기가 된 것인데, 하필 재벌가에서 사고를 쳐준 셈이다.
일요신문 DB
재벌과 검찰은 때로는 공생, 때로는 적대 관계를 이어가면서 미묘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 검찰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재벌을 견제하기 위해 계속 범죄 첩보를 모으고 수사를 벌이며 견제해 왔다. 대기업 수사는 혐의가 있다고 해서 마냥 수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검찰 내에서 정치권 수사와 함께 대기업 수사는 여전히 청와대 ‘재가’를 받은 뒤에야 착수가 가능하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찰 관계자는 올해 수사 전망과 관련, “수사 단서가 있으면 어떤 수사라도 한다. 혐의가 있는데 수사를 피하거나 하지 않는다”면서도 “대기업에 대한 전면 수사는 보통 정권 말에 시작되는데 이제 대통령 임기 3년차 아니냐”고 에둘러 표현했다. 여당쪽 한 관계자도 “올해는 경제 살리기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 대기업과 공존을 해야 할 시기다. 이럴 때 대규모 수사로 발목을 잡히는 걸 청와대가 원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수사를 마음껏 할 수 없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 또한 검찰의 입장이다. 범죄 정보를 계속 수집하면서 동향을 살피는 한편 고소·고발이 들어올 경우 적극 수사에 나서면서 대응을 하고 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검사들은 이럴 때 첩보를 열심히 모아 다음 임지로 떠날 때 자료를 갖고 간 뒤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고 말했다. 때문에 검찰 수사가 잠잠할 때 기업들은 더 긴장한다고 한다. 대기업 대관 업무 담당 직원들은 다음 타깃이 누가 될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대기업의 대관 담당 직원은 “가장 곤란한 건 역시 오너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 간 ‘세탁기 파손 논란’이 검찰로 넘어오자 검찰이 조성진 LG전자 사장(58)을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수사한 것 역시 ‘보여주기’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삼성전자 세탁기를 파손한 혐의(재물손괴)로 조 사장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그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쇼 2015(CES) 참석 등을 이유로 검찰 소환을 미루려는 모습을 보이자 집무실 압수수색은 물론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고 법원에 체포영장을 청구하는 강수를 뒀다. 사건이 사실상 두 회사의 ‘흠집내기’ 싸움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평이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조 사장은 ‘세탁기 박사’로 불리는 전형적인 학자형 경영자”라며 “사건 정황만 살펴봐도 의도적으로 세탁기를 부쉈을 이유가 없고, 경쟁사인 삼성전자 측의 흠집내기 싸움으로밖에 볼 수 없다. 사실 검찰 수사까지 갈 사안도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LG전자를 과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에서도 이런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조 사장이 부쉈다는 세탁기는 독일의 한 가전제품 매장에 진열돼 있던 것으로, 고의로 부순다고 LG전자에 특별히 이로운 상황이 연출될 것도 아니었다. 법원 역시 이 같은 정황 등을 고려해 검찰이 청구한 체포영장을 기각했다.
검찰 관계자는 “혐의 자체보다 출석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문제”라며 “대기업 사장이라고 봐주는 모습을 보일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역시 받고 있는 혐의보다 ‘괘씸죄’가 더 컸다는 얘기다. 결국 조 사장이 검찰 소환에 응해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돌아가자 검찰은 즉각 출국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떠들썩했던 출석 전 과정에 비해 수사결과는 초라하게 끝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방식의 ‘재벌 길들이기’ 전략의 경우 검찰이 주도적으로 수사 상황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내사를 벌여 범죄첩보를 찾아낸 뒤 수사 착수 시기를 정하는 전형적인 기획수사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처럼 ‘땅콩회항’이나 자체적인 분란이 일어 고소·고발 등 수사착수 근거가 생길 때에야 움직일 수 있다. 요새는 뜸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이유로 검찰에서 언론을 통해 범죄첩보 등을 흘린 뒤 고소·고발을 유도해 수사에 착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이유까지 겹쳐 대기업 재벌들은 올 한 해 한 층 더 몸을 사리게 될 것이란 관측이 높다. 결과적으로 재벌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검찰의 엄격한 잣대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칫 의외의 곳에서 기업의 명운을 저당잡힐 수 있다는 두려움도 남기게 됐다. 한 대기업 홍보팀 관계자는 “오너 일가 리스크를 관리하는 일은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가장 위급한 일”이라며 “이런 일이 한 번 터지면 다른 재벌가들도 알아서 몸을 사린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일 수도 있고…”라고 말했다.
조정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