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추적 결과 피의자는 충남 천안에 사는 김흥국씨(52)로 밝혀졌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김씨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자회견까지 자청해 “경찰청이나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협박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지난 98년 한화 이글스 프로야구단이 내 아들 기연(26)을 신인선수로 지명했지만 계약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화는 국내 및 해외 구단의 진출을 방해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화 이글스측은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 KBO(한국야구위원회)에 지명권을 해제했다는 공지를 했고, 다른 구단 진출 방해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는 입장이다.
양측은 서로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며 맞서고 있는 상황. 프로야구계도 긴장하고 있다. 해묵은 스카우트 관행에 대한 비판이 불거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그것.
자식에 대한 애끓는 부정(父情)이 빚은 해프닝인지 김씨의 주장대로 구단의 횡포로 인한 피해자의 항변인지 이 사건은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죄(협박 편지를 보낸 행위)는 충분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내 아들은 정말 억울합니다.”
유치장 면회소에서 만난 김씨는 시종일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로 협박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해 떳떳하게 밝히면서도 아들 얘기가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가 밝힌 사연은 이랬다.
김씨의 둘째 아들 기연씨가 프로야구선수 신인으로 지명받은 것은 지난 98년. 그러나 기연씨의 한화 입단이 무산된 이후 지난 7년 동안 김씨는 다른 일은 제쳐두고 이 일에만 매달려 왔다. 김씨는 청와대, 공정거래위원회, 언론사 등에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협박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편지에 동봉한 폭발물 뇌관은 김씨가 방파제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지난 76년부터 88년 사이에 모아두었던 것이었다. 김씨는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되면 한화 이글스와 내 아들 간에 얽힌 사건 전말이 공개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어떤 구단을 상대로 고소를 한 상태인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명색이 프로야구 선수 아버지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씨가 밝힌 큰 아들은 현재 한화 이글스에 뛰고 있는 김수연 선수. 그는 지난해 주전 외야수로 뛰었던 간판급 타자였다. 형에 이어 한화에 지명받은 동생 김기연씨는 그러나 구단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기연씨는 “사건이 벌어진 이튿날 형이 깜짝 놀라 집으로 찾아왔었다. 걱정할까봐 알리지 않았는데 팬이 알려줬다고 했다”고 말했다.
“형에게 불이익이 갈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형이 소속된 구단을 상대로 싸워왔다”는 기연씨는 두 살 터울인 형을 따라다니며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두 아들의 뒷바라지로 가세가 점점 기울어 갔지만 김씨 부부는 안해 본 일 없이 두 아들을 끝까지 지원해 주었다.
이후 형 수연씨가 먼저 꿈에 그리던 프로선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동생 기연씨 역시 고3 때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봉중근, 최희섭 등과 함께 청소년대표로 선발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막상 프로무대로부터는 한화 이글스로부터 신인 ‘2차 지명 8순위’에 지명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게 됐다.
프로구단 입단과 3천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하겠다는 대학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던 기연씨는 후자를 선택했지만, 지난 98년 불어닥친 IMF 한파로 대학측이 장학금 제의를 취소하는 바람에 진학 2주 만에 진로를 바꾸게 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단측에서 기연씨를 받아주지 않았다. “올해는 늦었으니 내년까지 기다려 보라”는 통보를 받았던 것. 한화 이글스측은 당시 상황에 대해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서 KBO에 미계약 사유서를 제출했고, 선수 구성이 다 끝난 상태에서 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김씨 부자는 구단을 상대로 지명권을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구단측이 강요해 각서까지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연씨가 전한 각서 복사본의 일부는 “지명권을 해제하여 주는 조건으로 본인과 김기연 선수는 귀 구단을 제외한 국내 타 구단에 입단 계약을 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며 약속이행을 못할 시에는 어떠한 구단의 요구(금전적 보상 사항 포함)도 감수할 것을 각서합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구단측은 “각서를 요구한 적도 없거니와 각서는 김씨가 자청해 쓴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연씨는 “지명권이 해제된 후 다른 구단들과 계약 성사 단계까지 갔다. 그런데 곧 정확한 사유 없이 안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명권이 풀려도 다른 구단에서 연습생이 아닌 프로선수로 뛸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다른 구단으로 갔다가 그 선수의 활약이 크면 지명권을 해제해 줬던 이전 구단이 타격을 입기 때문에 구단 간에 암묵적인 규율이 통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KBO측은 “지명을 했다가 계약 성사가 안되면 구단에서 지명권을 해제해 줘야 하는 것이 약관이고, 해당 선수는 당연히 다른 구단으로 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며 “실력있는 선수를 왜 다른 구단에서 데려가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보였다.
한편 “지명권 해제를 조건으로 썼다”는 각서 외에 김씨 부자가 한화측에 제기한 음모설 중 하나는 일본 요미우리 구단의 투구테스트 방해 사건.
구단측과의 계약이 불발된 후 기연씨는 일본 진출을 모색하기 나섰다. 그러나 기연씨는 “98년 6월 일본 요미우리 스카우트팀이 투구테스트를 하기 위해 왔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화 이글스 관계자가 같은 장소에 나타나 먼저 테스트를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화측은 “기연씨의 아버지로부터 투구테스트를 한다는 편지가 와 무슨 일인가 하고 관계자를 보냈을 뿐 방해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김씨측은 “형사소송 당시 투구테스트 현장에는 나타난 적도 없다고 말했다가 이후 간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등 말을 바꾸었던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일본 진출까지 무산되자 김씨는 아들이 군에 입대했다 제대하는 과정에서도 프로 진출을 모색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99년 2월에는 한화 이글스의 당시 단장과 사장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고, 청와대, 문화관광부, 공정거래위원회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2003년 7월 기연씨의 아버지가 제기한 지명제도 규약 심사를 맡았던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KBO측으로부터 지명제도에 관한 공식입장을 받은 검토한 결과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무혐의 처리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프로야구의 지명제도(드래프트제)란 KBO 규약에 따라 8개 구단이 모여 연고지 고졸 선수를 상대로 1차 지명을 하고 돌아가면서 2차 지명을 하는 제도로 구단은 지명 선수에 대해 2년 동안의 계약교섭권 보유기간을 갖는 제도. 지난 2002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신인지명제도에 대해 “구단의 2년 계약교섭권 기간에 아마추어와 군복무 기간은 포함되지 않아 지명구단에 입단할 수밖에 없어 선수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시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프로스포츠 신인지명제도에 대해선 구단측의 횡포로 선수들의 권리가 침해당할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견해와, 구단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막고 팀 간 전력 평준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 서로 맞서고 있는 실정.
이번 김씨의 협박 편지 사건을 계기로 99년 이후 잠잠하던 프로야구 지명제도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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