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을 흘리며 범행을 후회한 김씨가 바다에 시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맨앞 인물은 경찰관. | ||
지난 4월26일 새벽 1시 부산 광안대교 위에서 한 중년 사내가 눈물을 지으며 한 여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시신은 큰 여행용 가방 안에 담겨 있었고 열린 가방의 입구로 여인의 얼굴만 드러난 상태였다.
사내는 시신을 바다에 빠뜨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을 아무리 어루만져도 그녀의 웃음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마침내 사내는 여인의 시신이 든 가방을 다리 아래로 내던졌다. 그는 한참동안 시신이 바다에 가라앉는 장면을 지켜본 뒤 자신의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이 사내가 살인 등의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것은 그로부터 25일이 흐른 지난 5월20일. 그는 자신이 여인을 살해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이 사내는 여인을 죽인 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걸까. 경찰 수사에서 드러난 사내와 죽은 여인의 엇갈린 사랑에 얽힌 사연을 재구성해 보았다.
예의 사내는 부산에서 사채업과 무역 등 사업을 해오던 김아무개씨(47), 죽은 여인은 김씨와 동거를 하고 있던 임아무개씨(28)였다. 임씨는 부산 인근 지역에서 가정폭력상담소를 운영하던 인물. 그녀 자신이 다른 여성들의 ‘가정폭력 해결사’ 역할을 해왔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동거하던 남자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김씨가 임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5년. 당시 부산의 한 대학교 1학년생이던 임씨는 시내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씨가 그 카페에 손님으로 왔다가 종업원 임씨를 보고 호감을 갖고 접근했던 것. 이후 김씨는 그 카페의 단골이 됐고 임씨와도 자주 어울리게 됐다.
김씨는 임씨에게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했다. 적지 않은 선물을 건네며 물량공세도 펼쳤다. 김씨가 유부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씨에게는 사업체를 운영하며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그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김씨는 잘생긴 데다 실제 나이보다 10여 세 아래로 여겨질 정도로 젊어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9세에 달했지만 적어도 이때만큼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9년이나 계속된다.
이미 한 차례 이혼 경력이 있던 김씨는 당시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살던 중이었다.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자녀까지 두고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임씨를 만난 지 1년 만에 두 번째 부인과의 이혼을 강행한다. 임씨와 장래를 같이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임씨는 김씨와 만남을 이어오면서도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임씨는 대학원에 진학해 여성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임씨는 초등학교 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적이 있었고 부모의 불화로 순탄치 못한 가정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성문제와 가정폭력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 대학원 졸업 후 임씨는 서민층이 많이 사는 부산 인근의 한 지방 도시에 가정폭력상담소를 열고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임씨가 부모 곁을 떠나 지방 도시에서 홀로 지내게 되자 김씨도 임씨를 따라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불황으로 김씨의 사업은 점점 기울어졌고 급기야 임씨의 카드로 수천만원을 대출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임씨에게 김씨는 더 이상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초라한 이혼남일 뿐이었다.
이 즈음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임씨의 가족들도 김씨와 헤어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임씨는 김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김씨로서는 사업과 사랑 모두 궁지에 처했던 것. 임씨와 김씨는 매일 다투었고 이들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지난 4월24일 김씨는 임씨를 자신의 승용차에 태우고 경주로 향하고 있었다. 드라이브나 하자고 임씨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말다툼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경주 톨게이트 부근에 차를 세웠다.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지금까지 돌봐온 은혜를 저버릴 수 있느냐?”고 임씨를 다그치던 김씨는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임씨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짓던 임씨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해 임씨의 목숨을 빼앗고 만 김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꼬박 하루동안 임씨의 시신을 뒷좌석에 앉히고 차를 몰고 다녔다. 결국 김씨는 임씨의 시신을 바다에 내버리기로 결심하게 된다.
김씨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커다란 가방을 산 뒤 그 안에 임씨의 시신을 옮겨 넣었다. 그후 집에서 가져온 아령을 철사로 가방에 매달아 부산 광안대교 위에서 바다에 빠뜨렸다.
범행 뒤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김씨는 한때 일본으로 출국하기도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주변과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한편 임씨가 이틀 동안 상담소에 출근하지 않자 상담소 직원들과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냈다. 이들은 임씨와 김씨가 동시에 사라지자 무슨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임씨가 변을 당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김씨가 평소 나쁜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일 넘게 두 사람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자 경찰은 본격적으로 수사에 돌입했다.
그러던 가운데 지난 5월15일 부산 광안리 앞바다에 시신이 든 가방이 떠올랐다. 사체의 신원이 임씨로 드러나자 경찰은 용의자인 김씨를 긴급 수배했고 결국 닷새 만에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처음에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던 김씨는 경찰이 임씨의 시신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자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김씨는 경찰에서 “한순간 눈이 뒤집혀 임씨를 죽였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사건을 담당한 경남 양산경찰서 박창렬 형사는 “젊고 소신 있는 가정폭력상담소장이 자신의 가정문제로 결국 동거남에게 죽음을 당한 것을 보니 가정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