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9일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유영철이 황학동살인 현장 및 사체를 유기한 인천 월미도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 ||
형사3부는 초비상 사태에 들어갔다. 이승영 부부장검사를 비롯한 소속검사 4명이 이번 수사에 투입되는가 하면, 대검 과학수사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학자들에게 대거 ‘SOS’를 날렸다.
검찰을 더욱 긴장케 만드는 것은 인권 변호사들이 이미 경찰 부실 수사의 허점을 파고들고 있기 때문.
유영철 변호에 적극 나설 것으로 알려진 사형폐지운동협의회(사폐협) 회장 이상혁 변호사는 “이미 여러 문제점과 허점이 분석된 상태며, 법률적 검토에 들어갔다”고 <일요신문>에 밝혔다. 또한 유씨가 변호인 선임을 거부한다는 소식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면담에 응하고 있다는 것.
자칫 유씨가 진술을 번복할 경우 ‘21명을 연쇄 살해한 희대의 살인극’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전락될 위기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상혁 변호사는 “유 피의자가 다른 변호사단체의 면담은 거절했지만, 우리와의 면담엔 적극적이었다”며 일부 언론에 보도된 유씨의 변호인 제의 거절설을 일축했다. 이 변호사는 “그는 우리측과의 장시간 면담에서 지극히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대답을 했다”며 사폐협 사무총장 차형근 변호사와 유씨가 나눈 대화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점을 들어 그는 일부 언론에서 ‘무료변론 자청’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 유씨를 면담했던 차 변호사도 지난 29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당초 경찰측이 내게 ‘유씨가 변호사 면담을 거절했다’고 밝혔는데, 이후 만나보니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하더라. 아마도 부담이 됐던 경찰이 막았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차 변호사를 포함한 3명의 전문변호사가 유 피의자의 희망에 따라 변론 활동을 할 것이며, 재판 추이에 따라 나도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사폐협측은 차 변호사 주도로 이미 경찰 수사 발표를 뒤집을 만한 자료 분석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 변호사는 “다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변론작전상 지금 밝힐 수 없다. 하지만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검찰의 ‘위기감’은 자못 심각하다. 한 검찰 관계자는 “현재 밝혀진 것도 불확실한 판에 추가 범죄 수사는 무슨…”이라며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살인 사건에 대한 혐의는 상당수 배제하고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된 강도와 절도, 그리고 공무원 사칭 혐의로 우선 20일 안에 유씨를 기소한 뒤 추가적으로 세밀하게 증거 자료를 확보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경찰에 대한 노골적 불만도 흘러나오고 있다. “21명의 살인범이라는 것은 경찰의 주장일 뿐, 검찰은 아직 단 한 번도 유씨에 대해서 21명의 연쇄살인범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심지어는 “사체가 발굴된 윤락여성 11명 외에는 추가 기소가 어려운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서초동 검찰 주변의 변호사들은 “유씨가 살인 혐의 자체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겠지만, 21명을 죽인 희대의 연쇄 살인범이라는 경찰 주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란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한 중견 변호사는 “신문에 보도된 것만 봐도 제법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 지난달 26일 김용화 서울지방경찰청 수사부장이 연쇄살인사건 피의자 유영철에 대한 종합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가장 뜨거운 핵심은 유일한 증거물로 제시한 범행도구인 ‘망치’의 증거자료 채택 여부이다. 경찰은 당초 “망치를 유씨 오피스텔 인근 쓰레기통에서 발견했고, 그 망치에서 혈흔을 발견했다”며 완벽한 증거물로 내놓았다.
하지만 망치에서 발견된 혈흔은 유전자 감식 결과 이미 확인 불가능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증거 자료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유씨가 특수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망치를 언제 어디서 구입했는지조차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어 자칫 유씨가 자신이 사용한 도구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대책이 없는 상태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한 함께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칼이나 전기톱 등은 없이 망치만 발견된 것에 대한 의문도 풀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는 혜화동 CCTV에 찍힌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모습이다. 경찰은 당초 CCTV에 유씨의 정면 얼굴이 찍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화면은 얼굴이 너무 작아 필름 판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비교적 화면이 선명하게 찍힌 뒷모습을 공개하며 경찰은 “유씨를 보는 순간 뒷모습과 너무 흡사해 그가 범인이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지만, 뒷모습만으로 얼마나 증거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회의적이다.
세 번째는 범행 현장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피 묻은 수건. 하지만 이 역시도 유씨와의 상관 관계를 밝힐 만한 정황증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검찰은 망치와는 달리 수건은 증거 자료로 인정하지도 않는 분위기다.
네 번째로 경찰은 유씨가 노인 연쇄 살인 4건의 범행 장소와 내부 사정을 너무 상세히 알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이 또한 정황 증거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시각이다. 실제 사형 선고가 내려졌던 사건을 무죄로 뒤집은 바 있는 한 변호사는 “유씨처럼 범죄의 환상에 빠져든 자들은 신문 보도만으로도 충분히 마음 속으로는 열두 번도 더 그 집에 들어가서 자신이 실제 범행을 저지른다. 그것만 가지고 유씨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씨가 자신이 살해했다고 주장한 황학동 노점상 안아무개씨 살해 사건과 이문동 의류판매 여성 전아무개씨 살해 사건도 사체와 유씨 진술 말고는 직접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안씨 살해 사건의 경우 경찰은 물증을 찾기 위해 월미도 앞바다에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전씨 살해 사건도 마찬가지. 특히 전씨는 예리한 칼에 찔려 숨져 범인의 범행 도구가 망치가 아닌 칼로 판명났다. 하지만 이 칼의 존재도 오리무중인 것은 마찬가지. 다만 경찰은 “유씨가 지난해 9월 동대문시장에서 잭나이프를 구입했다”며 “이 잭나이프로 노인 연쇄살인 사건도 저지른 것 같다”고 추정했을 뿐이다.
현재로선 유씨의 확인에 의해 사체가 발견된 윤락여성 11명 살해 사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10명에 대한 유씨의 범죄를 입증할 만한 정황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하지만 윤락여성 11명 살해 역시 논란의 소지는 남겨져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흉기 등 다른 증거가 부족해, 발견된 11구의 사체만으로 모두 유씨 단독 범행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는 것. 검찰이 유씨 사건의 공범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행여라도 유씨가 ‘우연히 현장에서 사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환상에 빠져 거짓 진술했다’는 식으로 번복할 것을 대비해 보다 충분한 증거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이라며 “유씨의 당시 통화 내역 등을 보다 면밀히 재검토해야 윤락여성 11명의 살해 혐의를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씨가 경찰 조사 당시 추가 범행의 여부에 대한 경찰의 추궁에 대해 “그 범행까지 뒤집어써 줄 수도 있지만 나중에 진범이 잡히면 앞에 불은 범행까지 의심을 받을 것 아니냐”며 오히려 경찰을 달래는 듯한 말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갈수록 만만치 않아지는 유씨의 ‘옥중 처세술’은 향후 법정에서의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