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살해 용의자 박씨의 방. 박씨는 한 달 가까이 어머니의 죽음을 숨겨왔다. 아래는 1등에 당첨된 로또를 팔았던 판매점 모습. | ||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가 등장하는 엽기 사건 하나가 지난주 세상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머니를 살해한 뒤 시신을 집 안에 방치해 놓은 혐의로 패륜 아들 박아무개씨(33)를 경찰이 체포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로또 1등에 당첨돼 21억원을 챙긴 횡재의 사나이였던 것.
그러나 사건은 다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을 맞는다. 피의자 박씨가 문제의 로또복권을 누군가로부터 훔쳤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 자연 로또의 원주인이 누구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이내 박씨 집에서 로또복권의 ‘진실’을 밝힐 단서가 발견됐고 결국 원주인은 건축 관련 일을 하는 김아무개씨(51)로 밝혀졌다. 김씨는 정작 자신이 샀다 도난당한 복권이 1등에 당첨됐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경찰의 연락을 받고서야 ‘되돌아온 횡재’를 실감했다. 전모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김씨는 로또복권보다도 자신의 생업에 필요한 작업도구들이 담긴 가방을 도난당했던 걸 더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반면 돈 문제로 다투다 어머니를 살해한 피의자 박씨로서는 돈벼락을 맞았다가 다시 날벼락을 맞았던 셈. 실제 벼락 맞기보다 더 어렵다는 로또 1등 당첨금을 두고 천당과 지옥을 오간 두 사람의 기막힌 이야기를 뒤따라가봤다.
지난 8월21일 오후 5시50분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D빌라에 사는 한 주민으로부터 경찰에 신고가 들어왔다. 지하층의 집에서 마치 시체가 썩는 것 같은 지독한 악취가 난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받은 서울 은평경찰서 관할 역촌지구대가 출동해 D빌라 지하층 집 문을 두드렸다.
이미 악취가 빌라 계단 전체에 퍼져 있던 상황이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경찰은 열쇠수리공을 불러 문을 따기로 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지하층 집 문이 열리면서 30대 사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피의자 박씨였다.
경찰이 수상쩍은 냄새에 대해 추궁하자 순간 당황한 박씨는 “나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며 현관 입구 쪽 방문을 열어 보였다. 방안에 놓인 박씨 어머니 배아무개씨(50)의 시신은 이미 한 달 가까이 방치된 듯했다. 8월의 폭염 속에서 썩을 대로 썩어 구더기가 들끓었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박씨의 설명은 이러했다. 신용불량자인 자신을 채권자들이 집요하게 찾아다녀 집을 나가 노숙생활을 해왔는데 지난 8월11일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는 왜 그간 이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던 걸까.
박씨는 경찰에서 “신용불량자라 경찰에 신고할 처지가 못 됐다. 게다가 내가 신고를 하면 나를 범인으로 의심할 것으로 생각해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아리송한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박씨는 ‘신불’ 상태였다. 그는 지난 2000년 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2년간 서울 황학동에서 중고카메라 수리 및 판매점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영업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는데 당시 사채와 함께 3천5백만원의 카드빚을 지고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 이후 카드회사와 사채업자들로부터 심한 빚독촉에 시달리면서 어머니와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됐다고 한다.
2남 1녀 중 둘째인 박씨는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와 단둘이서 생활해 왔다. ‘하나’뿐인 아들이 돈 문제로 시달리면서도 일할 생각은 않고 거의 매일 밖에서 밤을 새자 어머니 배씨는 박씨를 자주 다그쳤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어머니 배씨는 성격이 괄괄한 반면 아들 박씨는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경찰은 소심한 성격의 박씨가 어머니와 다투다 분을 참지 못해 어머니를 부엌칼로 살해한 것으로 추정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숨기려 한 박씨의 행동 자체가 가장 강력한 용의점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살해 일시나 구체적인 동기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다. 지난 8월의 폭염으로 시신의 부패가 너무 심해 살해 일자를 명확하게 밝히기는 힘들지만 경찰은 7월 초순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의자 박씨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박씨 집에서 나온 1천만원짜리 수표 6장이 단초였다. 경찰은 돈의 출처를 추궁하던 중 박씨로부터 ‘지난 8월7일 추첨한 88회차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어 21억원(당첨금 31억7천만원)을 수령했다’는 진술을 들었다.
‘어머니 살해범에게 로또 횡재의 행운이 돌아가다니….’ 경찰은 현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게다가 박씨의 집에서 다른 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갑이나 가방들이 여러 개 발견됐다.
▲ 박씨가 훔친 김씨의 물건들. | ||
경찰은 로또복권 주관 은행인 국민은행 관계자들을 통해서도 복권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은행측은 로또복권은 무기명이기 때문에 당첨자가 실제 구매자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복권이 진품인지 아닌지만 확인할 뿐 복권을 가진 사람을 당첨자로 보기 때문에 판매점 확인 등의 절차를 따로 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박씨의 복권 관련 진술이 애매모호하자 경찰은 박씨의 집에서 나온 가방과 수첩의 신상명세를 토대로 도난 피해자를 찾아나섰다. 그 결과 공사 현장에서 건축 설비 일을 하는 김아무개씨(51)가 같은 가방과 수첩 등을 도난당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도난 피해자 김씨 또한 복권 구입 사실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평소에도 로또를 여기저기서 많이 사는 데다가 당일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복권을 구매한 사실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은 문제의 복권 구입장소와 김씨의 거주지가 일치한 점으로 보아 김씨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를 밝혀내기 위해 탐문을 시작했다.
경찰은 해당 복권을 판매한 용산구 원효로의 가판점에 김씨를 데리고 가서 확인을 했으나 판매자인 이아무개씨(61)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씨는 “하루에도 수백 명이 사가는 데다가 얼굴도 보지 않고 팔기 때문에 그 사람이 샀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고 밝혔다.
김씨가 경찰에서 밝힌 도난 과정은 이랬다. 그는 복권추첨일인 8월7일이 지난 후에도 당첨번호를 확인하지 않다가 8월8일 역촌동의 친척집에서 술을 마신 뒤 응암역 근처 삼각공원에서 잠이 들었다. 밤 9시께 김씨는 누군가 자신을 더듬는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집에서 가족들이 자신을 깨우는 것인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 보니 가방과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
당시 김씨의 가방에는 안전화, 벨트, 수첩, 손목보호대, 현금 10만원 등이 들어 있었고 지갑에는 현금 3만원과 로또복권 1매, 즉석복권 2매, 운전면허증, 각종 카드 4개가 들어 있었다. 피의자인 박씨는 지갑에서 현금과 복권만 빼낸 뒤 빈 지갑을 버리고 가방만 집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복권의 진짜 주인을 밝히기 위해 국민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복권 원본의 지문검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지문이 묻어 있어 김씨의 지문을 채취해내지는 못했다.
경찰은 다시 복권에 표기된 구입일시 8월3일 화요일 오후 8시57분 당시의 박씨와 김씨의 행적을 추적했다. 일종의 알리바이 조사였다. 당일 김씨는 복권 구매장소 부근의 공사장과 식당에 머문 것이 확인됐으나 박씨는 자신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김씨의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박씨가 자신의 것이라고 계속 주장할 경우 김씨가 당첨금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피해자 김씨는 자신이 수첩에 로또 번호를 써놓은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꺼냈다. 당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집에 와 로또복권의 숫자를 보고는 5개의 조합 중 ‘1’번이 3개나 있는 것을 보고는 ‘왜 이리 숫자가 안 좋아’라고 푸념했던 기억이 난다며 혹시 도난당한 수첩에 번호를 적어놨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경찰은 박씨의 집에서 압수한 물품 중 김씨의 수첩을 꺼내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실제로 한 면에 여러 행의 숫자가 기록돼 있었다. 이 숫자와 복권의 숫자를 대조해 본 결과 당첨번호뿐 아니라 당첨되지 않은 번호들까지 똑같았다. 로또복권이 김씨의 것임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처음 자신의 행운을 의아해하던 김씨도 “사필귀정”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 한 번 당첨되기도 힘든 로또복권에 1등으로 당첨된 데다 이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게 된 김씨를 두고 주변에서는 “억세게 운좋은 사람”, “로또가 당첨자에게 끝내 돌아가는 것을 보니 당첨될 운명이 따로 있긴 있나 보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했지만 피의자 박씨는 존속 살해 및 절도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경찰 관계자는 “박씨가 돈 문제로 어머니를 살해했다가 불과 한 달 만에 훔친 복권으로 횡재를 했으나 결국 어머니의 주검이 단서가 돼 빈털터리가 되는 것을 보니 묘한 운명의 굴레를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어머니를 살해한 뒤 시체를 내버려둔 채 어머니의 은행 통장에 든 돈과 전세금 2천8백만원을 차지하기 위해 어머니 명의의 위임장을 작성하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어머니 배씨의 통장에 든 돈은 3백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