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6·15선언 4주년 기념 만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리종혁 부위원장, 도널드 그레그 전 미 대사가 건배하는 모습.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외적인 활동은 넓히면서 여권의 ‘러브콜’엔 반응이 없어 여권 관계자들을 애태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
여기에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이 정국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지 못한 채 DJ를 향해 구애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내년 4월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과반 의석이 붕괴될 위기감마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여권 내에선 DJ의 지원사격이 절실하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바야흐로 ‘DJ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DJ는 팔순 고령에도 불구하고 ‘노익장’을 과시하며 퇴임 이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10월 들어 그의 행보는 눈에 띌 정도로 활발하다. 지난 5일 국제평화군축단체인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 기조 연설을 시작으로, 7일엔 임종석 의원 등 열린우리당 초·재선의원들과 신임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 대사 등의 예방을 받았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30주년 행사(11일), 제5회 세계지식포럼 개막식(12일) 등에도 참석해 연설했다. 13일엔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 등의 예방을 받았고, 14일엔 자신의 구명운동 등에 앞장서 반국가 단체로 지목됐던 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회원들과도 만났다. 15일엔 조선호텔에서 열린 연세대 총동창회 초청강연에도 참석했다. 동교동 주변에서 DJ의 건강을 우려할 정도로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을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DJ는 퇴임 이후 ‘국내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DJ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해 민주당이 분당사태를 맞았을 때도 일언반구 이렇다할 만한 논평을 하지 않았다. 지난 4·15 총선 전에도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러브콜’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총선이 끝난 5월부터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듯 조심스럽게 운신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노르웨이 등 유럽 3개국을 순방했고(5월말), 중국에도(6월) 다녀왔다. 국내보다는 해외 순방에 치중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런 DJ를 최근 들어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흔들고’ 있다. DJ가 여당의 우군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여당이 이렇게 DJ에게 구애의 손길을 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DJ를 경색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를 풀어줄 최적임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에서 북한 인권법이 통과된 데다, 탈북자 입국이 잇따르고 있고, 북핵 6자 회담도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그에 대한 기대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을 위한 ‘대북 특사설’이 흘러나왔다. 대북 특사로 DJ를 비롯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정동영 통일부장관 등이 거명되고 있지만, 여권에선 이들 가운데 북한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DJ가 대북 특사로 나서 주길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DJ는 지난 13일 이부영 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특사로 방북 하는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나와 합의해서는 책임질 수 없을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과 약속해야 책임 있게 해 나갈 것”이라며 대북 특사 제안을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힘 닿는 데까지 나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측면’에서 지원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와 관련해 지난 13일 이부영 의장과 함께 동교동에 다녀온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은 “DJ와 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남북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북핵 문제 등이) 악화됐을 때 DJ가 해결하러 (대북 특사로) 가는 것은 맞지만, 지금은 그럴 시점이 아니다”고 말해 향후 정세변화에 따라 DJ가 대북특사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여권이 DJ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까닭은 비단 경색된 남북문제 해결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국내 정치 상황도 여권에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DJ의 지원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특히 총선 이후 호남민심이 차갑게 식고 상황이어서 여권에선 DJ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절박감마저 감돌고 있다.
<일요신문>이 입수해 보도했던(제645호, 9월26일자) ‘열린우리당 자체 여론조사’ 문건에 따르면, 광주·전남 지역에서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한 반면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오는 30일 치러질 지역단체장 및 지방의회 재·보선을 앞두고 지난 13일 실시한 <전남일보>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재보선이 치러지는 전남 강진과 해남 지역에서의 민주당 지지율이 각각 52%와 43%인데 반해 열린우리당은 25.2%, 17.6%로 민주당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높았던 호남 지역에서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열린우리당 소속인 호남지역의 한 의원은 “추석 연휴 때 친한 지역 주민들을 만났더니 얼굴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대부분 ‘여당이 호남을 너무 소외시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며 “솔직히 이번 (30일) 재보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여당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년 4월30일 실시될 예정인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더 큰 문제라는 게 여당 관계자들의 중론. 지난 4·15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본인이 기소된 현역의원은 모두 46명. 이 가운데 11명이 1심 재판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다. 현재까지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은 11명 가운데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이 8명(한나라당 2명, 자민련 1명)에 달해 여당에 집중돼 있다. 여기에 1심 재판이 진행중인 여야 의원이 20여 명에 달해 무더기 재·보선이 예고되고 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1백51석)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당으로선 당장 ‘DJ 끌어안기’를 통해 호남지역 민심뿐만 아니라 전국의 호남출신 지지층을 붙잡아야 한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당 일각에서 제기되는 민주당과의 통합론도 어찌 보면 DJ의 환심을 얻겠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동교동의 한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고 못을 박았다. 이처럼 DJ는 여권의 구애에 대해 아직 아무런 화답을 하지 않고 있다. 이래저래 여권에선 DJ의 눈치만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