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건을 수사중인 경찰 관계자는 “범인들이 7조원 사건은 연습 삼아 했고 이들의 진짜 목표는 농협의 66조원이었다”고 밝혔다. 더욱이 검거된 사기 일당은 “원래 목표는 90조원이었다”고 말해 이들의 ‘배포’에 경찰도 혀를 내둘렀다.
이들 일당은 사전에 철저한 계획 아래 범행을 시도했으며 점조직 형태로 움직여 경찰이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건을 맡은 동대문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사기일당들이 소위 ‘꾼’들이고 자신들의 신원을 철저히 숨겨 아직 잡히지 않은 일당들은 이름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존해 별명과 키, 나이대 등만 추측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의 사기극에는 3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주범 격인 배아무개씨(59)는 전과 5범으로 일명 ‘배 회장’으로 불리며 범행 전반을 계획했다. 아직 잡히지 않은 일명 ‘정 실장’(재경부 직원 사칭, 신원미상)은 행동총책으로 사기행각에 활용할 ‘선수’들을 모집, 관리하고 이들에게 역할을 배정했다. 정 실장이 선수들을 모집해 오면 다시 그 선수들이 다른 선수들을 끌어들이는 식이었다.
또 ‘왕 회장’으로 불린 신아무개씨(63)는 미국 영주권자로 사기일당이 ‘안가’(정보기관의 안전가옥)라 부른 한남동의 1백 평짜리 고급빌라와 외제차를 배 회장 일당에게 제공하며 범행에 가담했다. 이렇게 해서 배씨, 정 실장, 신씨 등 주모자급 3명이 끌어들인 사람은 모두 15명. 이 중 5명은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
배씨 일당의 첫 범행은 지난해 12월 외환은행 직원인 임아무개씨(33)에게 접근하면서 시작됐다. 배씨 일당은 각자 청와대, 국정원, 정보사, 재경부, 금융감독원 직원 등을 사칭해 “우리는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이다. 역대 정권의 비자금을 세탁해 국책사업을 하려 한다. 협조하면 재경원 간부로 특채하고 수고비로 4백50억원을 주겠다”며 임씨를 포섭했다.
배씨 등은 항상 짙은 색 정장 차림에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은밀히 행동했다. 임씨는 배씨 일당이 ‘안가’라고 부른 신씨의 고급빌라와 청와대 마크가 찍힌 통장 등을 보고 이들이 정부기관 요원들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임씨는 이들의 각본에 따라 지난 3일 관리가 허술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액면가 9천9백억원짜리 자기앞수표 7장, 총 6조9천3백억원을 허위로 발행해 배씨 일당의 계좌에 이체시켰다. 돈이 입금되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역대 정권의 수조원대 비자금을 곧바로 채워넣는 조건이었다.
경찰 조사에서 임씨는 “배씨 등이 ‘금감원을 시켜 점심시간대 은행감시전산망을 정지시켜 놓을 테니 안심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해 그대로 했다”고 진술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비록 임씨가 발행한 수표가 허위일지라도 이미 계좌이체가 완료됐기 때문에 6조9천3백억원은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배씨 일당은 이날 한 시중은행 본점에서 이 돈의 일부를 분산 이체하고 또 일부를 인출하려다 실패했다. 거액의 수표는 입금 후 다음 날에야 인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 인출을 시도하던 일당은 은행직원으로부터 “오늘은 인출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이를 의심한 은행직원이 경찰에 신고했고 현장에 있던 일당 2명은 통장을 들고 도망가 버렸다.
임씨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기극에 속은 것을 직감해 경찰에 신고하려다 배씨 일당에 납치돼 4일간 감금됐었다. 이들 일당은 임씨에게 “국정원 직원을 불러 권총으로 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7조원 인출이 실패로 끝나자 배씨 일당은 곧 제2의 범행에 들어갔다. 공범 중 한 명이 잘 알고 지내는 지방 농협 출장소 지소장 박아무개씨(42)를 포섭해 66조원 불법이체를 시도했던 것.
배씨 일당이 박씨를 포섭하기는 더욱 쉬웠다. 박씨에게도 비자금 세탁을 도와주면 거액의 수수료와 고위 공무원 특채를 약속한 것은 마찬가지. 이와 함께 배씨 일당이 청와대 마크가 찍혀 있는 6조9천3백억원이 들어있는 외환은행 통장을 보여주자 박씨는 이들이 ‘정부 고위인사’라고 믿었다.
이들은 이번에도 관리가 소홀한 점심시간대를 이용했다. 박씨는 사기일당의 지시에 따라 지난 7일 12시께부터 30분 동안 거래전표를 조작해 33회에 걸쳐 2조원씩 모두 66조원의 돈을 배씨 일당의 차명계좌에 입금시켰다. 박씨는 “수십조원을 이체시켰음에도 농협본부에서 확인전화 한 번 없어 정말로 배씨 일당이 금감원 전산망을 일시 정지시킨 줄 알았다”고 말했다.
배씨 일당은 66조원이 무사히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서울의 한 농협지점에서 이 돈을 쪼개기 위해 또 다시 분산이체를 시도했다. 앞서 범행에서 수표는 당일 인출이 안됨을 알았기에 이번에는 분산이체만 시도했던 것. 그러나 농협 직원이 배씨 일당이 이체하려는 66조원이 웬만한 시중은행의 예치금보다 많은 점을 수상히 여겨 경찰에 몰래 신고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범행이 들통 났다. 경찰 수사결과 박씨는 농협에 재직하면서도 개인사업을 하다 억대의 빚을 떠안게 되자 이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수사 중 박씨의 명함이 앞서 6조원 사기에 연루된 임씨의 주머니에서 나온 점을 추궁해 두 사건이 배씨 일당의 소행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이들이 빼돌리려던 66조원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절반 수준이고, 1만원권으로 환전하면 10톤 트럭 7백26대 분량이다. 배씨 일당이 정말 이런 거액을 모두 인출하려 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한편 수사가 계속되면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있는 것으로 드러나 경찰은 이 역시 배씨 일당의 소행인지 여부를 가리고 있다. 수사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강남의 한 수협지점에서도 CIA 한국지부장을 사칭해 UN기금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2조원대의 불법이체 사건이 있었다. 그 수법이 이번 농협 불법이체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고 전했다.
경찰은 수협사건도, 지방의 한 수협 지소장을 포섭해 2조원을 불법이체시킨 후 서울에서 인출을 시도한 점, 관리가 소홀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입금토록 한 점 등 이번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