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수서경찰서는 의류무역업자 등을 협박해 23억원을 뜯어낸 사채업자 김아무개씨(41)와 조직폭력배 홍아무개씨(30) 등 5명을 공갈협박 및 폭력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사채업자 김씨는 강원도 춘천에서 악성 채무를 해결하는 조직폭력배, 일명 ‘진상조’를 거느리고 유흥업소 종업원 등을 상대로 고리사채업을 해오던 인물. 사건은 김씨가 ‘동남아에서 의류를 수입해 되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2003년 무역업에 손을 대면서 비롯됐다.
무역에 문외한이었던 김씨는 주변 사람을 통해 태국에서 의류 1억원어치를 수입하게 된다. 이때 김씨는 의류무역상 유아무개씨(31)와 주아무개씨(31)가 함께 운영하던 회사의 명의를 잠시 빌렸다. 그러나 김씨가 수입한 의류에 하자가 생겨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면서 사단이 벌어졌다. 김씨가 명의를 빌렸던 회사의 대표인 유씨와 주씨에게 다짜고짜 손해를 물어내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던 것.
유씨와 주씨로서는 김씨의 느닷없는 요구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김씨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고, 무역을 하다보면 영세 무역업자에게 명의를 빌려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수입 루트나 현지에서의 물품 매입은 모두 김씨가 알아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씨는 “통관을 못해서 내가 손해본 것을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 당신들이 책임지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 액수도 세관을 통과하지 못한 옷값 1억원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김씨의 요구는 의류 수입으로 큰돈을 벌려고 했으나 수입이 무산됐으니 그 큰돈에 해당하는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즉 1등 당첨금을 노리고 로또복권을 사려고 했는데 로또복권을 못 사게 됐으니 1등 당첨금에 해당하는 돈을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입한 옷이 세관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씨는 수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실질적인 손해는 한 푼도 없는 상태였다.
유씨와 주씨가 요구를 거절하자 김씨는 악덕 사채업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김씨는 휘하 ‘진상조’를 거느리고 수시로 두 사람의 사무실에 나타나 집기를 파손하거나 행패를 부렸고, 집까지 따라다니며 돈을 구해오라고 닦달했다. 유씨와 주씨가 몸을 피하면 김씨는 어김없이 이들을 찾아내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 두 사람은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해봤지만 “보복”을 외치는 김씨의 서슬에 눌리고 말았다.
그러던 2003년 10월 어느 날 김씨는 폭력배들과 함께 유씨를 승용차로 납치해 한강고수부지로 끌고갔다. 강제로 무릎을 꿇린 유씨에게 “5억원을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이 이어졌다. 폭력배들은 윗옷을 벗어 문신을 보여주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유씨는 경찰 조사에서 “당시 김씨와 폭력배들이 정말 나를 죽일 기세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끔 쳐다보기만 했을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씨는 그 자리에서 가지고 있던 현금과 휴대폰, 목걸이를 빼앗겼고 자신의 회사 창고에 보관중이던 1억여원 상당의 의류를 김씨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 김씨는 유씨를 데리고 주씨에게로 가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 현금 1천만원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것은 기나긴 악몽의 시작에 불과했다. 김씨는 곧 유씨와 주씨를 여관으로 끌고가 감금시켜버렸다.
그런 후 김씨는 주씨의 아내까지 불러내 “당신 남편이 도박빚을 졌는데 안 갚고 있다. 돈을 구해오지 않으면 당신 남편은 죽는다”고 협박했다. 김씨는 울며 애원하는 주씨의 아내에게 2억5천만원짜리 차용증을 강제로 받아낸 다음 다시 유씨와 주씨를 차에 태웠다. 목적지는 강원도 춘천의 외곽. 바로 김씨 일당의 ‘아지트’인 사채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김씨의 사무실 건물에 도착한 유씨와 주씨는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허허벌판에 세워져 인적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 한 수사관은 “김씨의 사무실은 워낙 외진 곳에 있어 피해자들이 탈주했더라도 인가를 찾아 헤매다 지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씨는 두 사람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너희를 이곳에 묻어 버리겠다. 여기에 파묻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겁을 줘 각각 7억5천만원짜리 차용증을 받아냈다. 공포에 휩싸인 유씨와 주씨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김씨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김씨의 협박은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유씨에게 “친구들에게 전화해 당장 5천만원을 만들어 오도록 하라”며 다그쳤다. 김씨는 유씨의 친구에게 “5천만원을 안 가져오면 유씨를 묻어버리겠다”고 협박해 현금 2천7백만원과 차용증 5천만원을 받아냈다. 그런 뒤에야 유씨와 주씨는 4일간의 감금과 폭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두 사람이 김씨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김씨는 돈 좀 있어 보이는 유씨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유씨는 혹시라도 가족에게 불똥이 튈까봐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여관과 찜질방을 전전하며 김씨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유씨는 다시 김씨 일당에게 붙잡혀 자신의 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김씨는 중풍으로 몸져 누워 있던 유씨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이 내 돈 빌리고 안 갚았다”고 윽박지르며 인감을 빼앗았다. 그리곤 유씨 아버지 소유의 집에 2억3천만원짜리 근저당을 설정해놓고 압류까지 해버렸다. 유씨로서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 끝까지 가족만은 지키려 했는데 아버지가 평생을 일해 마련한 집까지 빼앗겨버린 신세가 됐던 것이다.
유씨는 일기장에 “폭력은 정말 법보다 먼저 존재하고 가까운 것인가. 두렵다”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피를 토하는 것처럼 속이 아프다” “사형선고를 받아놓고 기다리는 것 같다” “사방곳곳에서 나를 잡아먹으려는 사람들뿐이다. 정말 나에게 먹을 것이 많은가” “나 하나 죽으면 모든 게 끝나겠지”라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기록했다. 급기야 지난 2월 그는 수면제 5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친구 신씨가 발견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죽음까지 각오한 유씨는 친구의 설득으로 결국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수사관계자는 “유씨가 사회경험도 적고 유순한 성격이라 노회한 김씨 일당의 행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특히 가족에게 해가 갈까봐 걱정이 컸던 것 같다. 조금만 더 일찍 신고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유씨는 이제 기나긴 고통에서 벗어난 듯 “새 삶을 찾게 해줘 고맙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