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전경. | ||
오랜 수사 경력을 갖고 있는 서울의 한 베테랑 형사가 밝힌 자신의 수사 경험담이다. 지난 9월 26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강력2팀은 또 하나의 청와대 권력 사칭 사기 사건을 발표했다. 지난해까지 서울 여의도 N호텔의 회장 직함을 갖고 있던 김아무개씨가 그 주인공. 경찰측은 “정치권과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는 단순 사기범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탐문 취재 결과, 그는 실제 2002년 대선을 전후한 시기에 N호텔 회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정치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여의도 정치인들의 막후 협상처로 유명한 자신의 호텔을 수시로 드나들던 정치인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도 정치권 인사가 된 것인 양 착각 속에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는 게 주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경찰이 밝힌 이번 사건의 전모는 외견상으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단순 사기 사건에 불과했다. 사업가 김씨는 2001년에서 2004년까지 3년 동안 경영하던 호텔이 부도가 나자 지방으로 숨어다니며 자금 마련에 골몰했다는 것. 그는 N호텔 전 회장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 자신이 서울 유명 호텔의 회장이면서 동시에 대통령 최측근으로 현재 대통령 비밀특별보좌관으로 있다고 속였다.
그는 측근 2명을 자신의 호텔 부사장과 운전비서라고 속여서 함께 대동하고 다녔다. 이들은 충남의 한 50대 여성 재력가 고아무개씨에게 접근하여 “○○ 등 3개 호텔의 경매에 투자하면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적은 돈으로 이를 경락받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속여 로비자금 명목으로 현금 18억원과 순금 41냥을 받아 챙겼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피해자 고씨는 막상 김씨 일당이 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자신이 속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경찰은 “김씨 일당의 의심스런 행각은 고씨가 아닌 주변의 첩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고씨는 “김씨가 ‘나는 대통령과도 호형호제할 정도로 각별한 친분이 있다. 또한 현직 청와대 경호실장, 대법관, 검찰 고위 인사 등 9명으로 구성된 구인회의 멤버’라고 자신을 소개해서 그런 줄 알았다”고 경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가 본 김씨의 집 안에 걸려 있는 두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선명한 위촉장과 감사 편지, 그리고 현 서울시장의 표창장 등은 이런 믿음에 보다 더 확신을 안겨주었다.
지방에서 여성 혼자의 몸으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성공한 사업가의 반열에 오른 고씨가 이처럼 어리숙하게 속은 점에 대해서는 수사관들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 광역수사대 강력2팀의 한 관계자는 “당초 수사가 김씨 일당의 행적을 수상히 여긴 주변 사람들의 첩보에 의해 시작된 것인 만큼 피해자가 고씨 외에도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특히 이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상대로 이 같은 사기 행각을 더 벌였다는 첩보도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김씨가 자신의 말처럼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여의도 N호텔 회장을 지낸 전력은 있으나, 딱히 다른 배경이 있다거나 정치인과의 친분 관계가 드러난 것은 없었다”면서 “집에 전시한 표창장과 위촉장 등도 그냥 호텔 대표로서 흔히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단순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
하지만 한때 서울의 유명 호텔을 경영하던 그의 전력으로 볼 때 단순 사기범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기자는 김씨의 행적을 좀 더 탐문해 보기로 했다.
2001년 2월 N호텔 회장을 맡기 전까지 김씨의 전력은 거의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건축업과 호텔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다분히 정치적인 행보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95년 6월 지방선거 당시 민자당 최기선 인천시장 후보의 선거본부 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위촉장이 그의 집에 걸려 있었다.
그가 정치권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N호텔 경영을 맡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김씨는 동업자들과 함께 기존의 호텔을 임대 형식으로 빌려서 이름도 바꾸고 새 단장을 한 뒤 자신이 회장을 맡았다. 그런데 당시 이 호텔의 상임고문을 맡은 이가 호남 출신의 민주당 S 전 의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4선의 중진급 의원으로 폭넓은 대인관계를 자랑하던 인사였다.
실제 그가 상임고문을 맡은 이후로 N호텔은 거의 민주당의 제 2당사가 되다시피 했다는 것이 호텔 주변 관계자의 전언이다. 특히 2002년 대선을 전후로 해서 민주당의 각종 워크숍 행사나 당 고위 관계자의 비공식 모임 및 회담은 항상 이 호텔에서 가졌다는 것. 심지어 당 상임고문단회의나 중도개혁포럼 등 당 계파 모임, 각종 기자회견 등이 모두 N호텔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대통령 또한 이 호텔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만남이나 모임 장소로 가장 많이 활용했던 곳이 종로의 S호텔과 함께 N호텔이었다는 것. 대선 직전 정몽준 후보 측과의 후보 단일화 막후 협상도 이 호텔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발을 항상 이 호텔에서 한 것으로 알려졌고, 대선 직후 당선이 확정된 상황에서 언론사들이 노 대통령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때에도 이 호텔의 8층에 머물며 외부 인사들을 따돌리는 등 개인적으로 자주 애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호텔 주변의 한 관계자는 “N호텔은 각종 정치 모임이 빈번하고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에 반짝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경영난에 허덕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2003년 들어 민주당의 분열에 따른 당세의 급격한 약화와 N호텔의 경영난은 궤를 같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2003년 9월 민주당의 분당 과정에서 한화갑 조순형 등 당 잔류파들은 N호텔에서 회합을 했으나, 정동영 김근태 등을 중심으로 권력 실세의 대규모 탈당파들은 종로구 평창동의 한 호텔로 옮겨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이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김씨는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월드컵의 성공적 유치에 도움을 준데 대해 감사한다는 감사 편지를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호텔 주변의 한 관계자는 “김씨가 실제 정치인과 친분을 맺었다기보다는 자신이 경영하는 호텔에 이런 고위 정치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고 또 호텔을 자주 이용하는 대선 후보가 당선되고 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권력과 밀착된 것처럼 착각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