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원 전 청주서부경찰서장이 지난 9월28일 도피생활 1년7개월여 만에 검찰에 검거됐다. 검-경 간에 수사권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터진 경찰 고위간부의 대형 비리사건에 시선이 몰리고 있다. SBS-TV 촬영 | ||
처음 김 전 서장이 검거됐을 때만 하더라도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비리 사건으로 보였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시점과 맞물려 터진 경찰 고위 간부의 비리 사건이라는 점에서 사건은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검찰은 이번 사건이 경찰 전체의 문제로 보고 ‘확전’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경찰은 검찰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며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등 검-경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전 서장을 둘러싼 새로운 의혹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검·경은 모두 겉으로는 “검·경 수사권 조정 논란과 이번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라며 사건 지휘 및 수사 과정을 모두 공조하고 빠른 시일 내에 사건을 철저하게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양측이 연일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상황에서 이 모습을 검·경의 진정한 속내라고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이번 사건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검찰 브레이크 밟지 않는다
청주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검찰은 이미 지난해 2월 김 전 서장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잠적한 시점과 거의 동시에 김 전 서장에 대한 구체적인 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그 때부터 이 사건이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 보고 예의주시했던 것이다.
김 전 서장이 경찰 승진 인사와 관련, 금품을 수수하거나 거액의 돈을 빌렸다는 소문은 모 지방경찰청에서 처음 입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곧바로 청주서부경찰서 청문감사관실에 진위 확인을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검찰도 김 전 서장의 비리 사실을 인지해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이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것은 김 전 서장이 잠적한 지 1년5개월이 7월 말이다. 당시 검찰은 “경찰의 수사 기록을 검토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 수사나 기소 중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며 검찰의 수사가 아직 초보 단계라는 점을 조심스럽게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해 3월 경찰청이 김 전 서장의 감찰에 착수한 시점에 이미 김 전 서장에 대한 계좌 추적까지 진행하며 비리 사실을 대부분 확인했다는 게 현지 검찰 주변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이후에 검찰은 곧바로 김 전 서장에게 국한돼 있던 수사 범위를 확대하는 강수를 구사했다. 김 전 서장이 청주서부서장으로 재직했던 2003년 8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그에게 돈을 빌려준 부하직원과 직계 가족 등 40명에 대한 계좌를 추적함과 동시에 청주서부경찰서에서 승진, 보직 변경을 한 경찰관 전원에 대한 인사 기록까지 검증한 것이다. 검 전 서장 개인의 추가 비리뿐만 아니라 아예 경찰서 상·하부 조직을 뒤흔들 수 있는 인사 관련 금품 수수의 입증에도 광범위한 추적 작업을 벌여왔던 셈. 이미 가속도를 낸 검찰로서는 급브레이크를 밟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메스 댈 것인가
경찰이 1년 7개월여 수사를 벌이면서도 아무런 행적도 파악하지 못했던 김 전 서장을 수사 2개월 만에 검거한 검찰로서는 일단 수사의 주도권을 쥔 상태다. 경찰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여론도 검찰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하고 있다.
여기에 힘을 받은 검찰은 김 전 서장의 근무 일지 대리 서명과 개인 물품 소각 의혹과 함께 김 전 서장이 사표를 낸 이후에도 봉급이 지급된 사실을 연이어 밝혀내며 경찰 전체로의 수사 확대 의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실제 검찰은 경찰의 원성을 사면서도 김 전 서장에 대한 중요한 수사 자료를 경찰에 넘겨주지 않은 채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주임 검사인 청주지검 조경헌 검사도 공공연히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밝혀내겠다”고 다짐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사실 김 전 서장을 검거한 직후만 해도 수사 진행 속도에 대해 검찰 내부의 분위기는 엇갈렸다. 검·경 간에 미묘한 감정이 흐르고 있는 시점에서 검찰이 김 전 서장 사건에 총력을 기울일 경우, 자칫 “검찰이 의도적으로 경찰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흔든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의혹이 드러나면서 검찰의 입장은 명확해졌다. 김 전 서장의 신병을 인계 받은 경찰이 스스로 허준영 경찰청장의 고려대 행정학과 1년 후배인 한정갑 현 경찰행정학교장까지 직권 남용 혐의로 입건하자 “수사 범위를 확대하면서 경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검찰 내 일부의 신중론은 수그러들었다. 더구나 X파일,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 음주 파동 등으로 곤욕을 치르던 검찰로서는 자연스럽게 ‘다음수’를 생각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오는 10월26일 김 전 서장을 기소할 예정인 검찰은 김 전 서장 개인 비리에서 김 전 서장 도피를 둘러싼 윗선 개입 여부, 상납 고리, 도피 자금 제공자, 도박 자금 출처 등 사건의 총체적 의혹을 모두 건드릴 심산이라는 게 현지 검찰 주변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실제 유일한 증거인 수표 추적은 경찰에 일임한 채 김 전 서장의 부인인 허아무개씨 등 주변인물들에 대한 집중 조사와 김 전 서장이 근무했던 청주서 관계자나 김 전 서장건을 담당했던 경찰 전담반에 대한 집중 추궁을 검찰이 직접 손을 대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경찰에 금융 추적을 맡긴 것은 금융 수사 전문가로 꼽혔던 김 전 서장이 수표로 돈 거래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아예 김 전 서장 주변인들을 추적하면서 김 전 서장과 경찰 내부의 은밀한 연결 고리를 찾겠다는 계산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한편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 청경회라는 정체불명의 경찰 유령 조직이 일부 언론사에 경찰 인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괴문서를 뿌려 경찰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검찰은 이 괴문서 대해서는 “본질과는 비켜가는 사안”이라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괴문서 파동이 과거 군 장성 괴문서 파문 때처럼 큰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에 대해서는 내심 부인하지 않고 있어 앞으로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김 전 서장 ‘원망’하는 경찰
검찰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반면 1년 7개월여간 김 전 서장의 소재 파악도 하지 못했던 경찰은 도덕적 해이뿐만 아니라 경찰 본연의 수사력까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검찰로부터 김 전 서장 신병을 인계받은 후 현직 치안감까지 입건하는 등 나름대로 명예 회복을 노리고 있으나 여론은 여전히 냉담하다. 특히 김 전 서장 검거 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이 지난달 경찰청 국정감사 자리에서 “수사구조 개혁은 국민의 70∼80%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으며 각종 조사에서 경찰의 도덕성과 청렴성은 검찰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강조한 허준영 경찰청장의 소신 발언 이후 표면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경찰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더구나 관할인 충북지방경찰청 내에서는 한 치안감 입건 과정에서 내분까지 발생한 상태라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충북경찰청 수사팀은 한 치안감을 명백한 직권 남용을 저질렀다는 입장. 반면 인사팀은 “고령자 우선 승진이라는 경찰청 지침 전달을 위해 김 전 총경에게 전화한 것”이라는 논리로 맞서는 상황이다. 경찰로서는 김 전 총경 사건이 경찰 내분으로까지 번지는 부분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 일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김 전 서장이 이번 사태가 오기 전에 일찌감치 혼자 짐을 짊어지고 조직에 누를 끼치지 않았어야 했다”는 원망 섞인 푸념도 흘러나오는 형편이다.
그래도 남은 의혹들
이번 사건에서 역시 가장 큰 관심사는 강원랜드에서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드러난 54억원의 출처다. 개인 비리 차원에서 종결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검찰은 단순한 채무 관계에서 오간 돈은 아닌 것으로 보고 또 다른 재산 은닉처가 있는지 여부까지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수사 여하에 따라서는 ‘게이트’로 확대될 개연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경찰 수사를 통해 김 전 서장이 15억원 정도를 부하 직원 및 지인들에게 빌린 것은 이미 확인된 상태. 따라서 검찰이 나머지 39억원에 대해 예상치 못한 ‘뇌관’을 터트릴지가 관심을 모은다.
이와 함께 김 전 서장의 도피와 관련, 경찰이 의도적으로 안일한 대응을 한 것은 아닌지에 관한 의혹도 사실로 밝혀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김 전 서장 사표 수리에 따른 후속 처리 및 김 전 서장 잠적 이후 도피 정보가 경찰 내부에서 어느 선까지 보고됐고 또한 김 전 서장 도피 1년 7개월여간 어떠한 조치가 취해졌는지에 대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경우, 수위에 따라서는 경찰 수뇌부까지 거대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