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자 방치한 우리 모두가 죄인
“아저씨,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지. 들어와서 마음에 드는 신발이 있는지 골라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밝게만 바라보던 열한 살의 어린 소녀 허아무개양은 친절한 아저씨를 가장한 범인의 말에 끌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범인은 가게 안으로 들어온 허양을 성추행하려다 반항하자 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 범인은 한 동네에서 신발 가게를 하던 김아무개씨(52). 그는 지난해에도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으로 구속돼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허양이 불에 타 숨진 시체로 돌아온 후 우리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충격에 빠진 주민들 중 일부는 며칠동안 가게 문을 닫는가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호소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평소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김씨를 ‘미친 사람’ 취급은 했어도 아이들을 성추행하고 살인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다는 것이 주민들의 반응이다. 우리 주위에서 빈발하는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 그리고 미성년자 성추행 전과범에 대한 소홀한 대책과 관련해 정치권까지 나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김씨가 서울 용산구 용문시장에 신발 가게를 차린 것은 지난해 4월. 30년 동안 구두 수선 기술로 생활해 온 김씨는 다른 지역에서 노점상을 하다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인근에서 김씨와 친하게 지내거나 함께 어울린 상인들 및 주민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이번 사건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 듯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인데도 김씨는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는 게 동네 주민들의 공통된 말이다.
박아무개씨(55)는 “동네 사람들이 김씨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라고 했다. 술을 안 마시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세트 테이프를 크게 틀어 놓은 채 가게에서 나오지도 않다가 술만 먹으면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것. 남자든 여자든 길 가는 행인들을 껴안는가 하면 사람들이 놀라 도망가면 욕을 퍼붓는 게 일쑤였다. 이렇게 화가 날 때면 구두 수선 칼로 동네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허양을 살해한 그 칼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마음이 뒤숭숭해 잠도 잘 못 이룬다는 인근 주민인 40대 여성은 “술만 마시면 미친 사람처럼 난폭했지만 그 칼로 누군가를 죽일 만한 사람은 못된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주변의 무관심으로 아이가 희생양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동네 주민들이 정신병자 취급하며 무시해 버린 김씨에게는 나쁜 버릇이 하나 더 있었다.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 성추행이었다. 신발을 사러 간 손님들을 껴안거나 엉덩이를 만지는 등 손버릇이 좋지 않았지만 화를 내는 수준에서 끝내 버렸다고 한다.
지난해 7월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를 가게로 유인해 성추행했던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동네 주민들은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김씨는 당시 아이 두 명을 자신의 가게로 유인해 그 중 한 명의 치마를 들추고 성기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했다. 또 다른 아이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성추행 장면을 목격하는 것 자체도 아이들에게는 성추행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아이 엄마가 경찰에 신고한다고 했을 때도 과잉반응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쉰 살이 넘은 남자가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애에게 무슨 그런 나쁜 짓을 하랴’ 했던 것이다.
동네 주민들의 무관심과 함께 그 당시에도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나오는 김씨의 행동으로 그 아이와 부모는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이가 예뻐서 만졌다’ ‘별 일 아니다’ ‘10만원으로 합의를 보자’는 등의 말로 피해자 부모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당시 아이의 부모가 김씨를 기소할 수 있도록 도운 ‘해바라기 아동센터’ 최경숙 소장은 “10만원이라는 금액이 적어서 합의를 안 해준 것이 아니다. 형편에 따라서 큰 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문제는 김씨가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경찰에 구속됐던 김씨는 그때도 “합의를 안 해준다고 내가 벌 받을 줄 아느냐”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김씨는 공탁금 2백만원에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동네로 돌아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가게 문을 열었다. 오히려 피해 어린이 부모는 어린 딸을 데리고 그 지역을 떠났다. 아이의 치료를 맡았던 해바라기 아동센터 측은 “아이는 현재 잘 지내고 있지만 심리 치료 결과를 확신할 수는 없다”며 “언제 다시 잠재돼 있던 기억이 되살아날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5개월 뒤인 2005년 2월17일,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경과는 이렇다. 혼자 집을 보던 초등학교 4학년 허양은 “비디오를 반납하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오후 7시 1분쯤 집에서 3백m쯤 떨어진 비디오 가게에 테이프와 만화책을 반납했다.
이때 허양의 눈에 띈 것은 건너편 신발가게 앞에 써 붙여진 ‘말만 잘하면 공짜’라는 문구. 허양에게 마음에 드는 신발이 있으면 골라보라며 안으로 불러들인 김씨는 갑자기 셔터를 내리고 허양을 껴안으며 강제로 성폭행하려 했다. 하지만 허양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김씨는 허양의 목을 칼로 찔러서 살해했다.
오후 8시경 평소 술에 취한 아버지 대신 가게를 정리하던 김씨의 아들(26)은 허양의 시체를 발견했다. 김씨 부자는 이날 밤 11시쯤 허양의 시신이 든 박스를 택시 트렁크에 실은 뒤 다음날 새벽 2시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용정리의 농로 옆 밭에 버린 뒤 불태웠다.
사건 후 주민들은 “그때 집행 유예 없이 그대로 1년형을 살았더라면…”하며 안타까워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김씨의 가게 건너편에서 장사를 하던 상점 주인은 “(허양 살해) 다음 날이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아들까지 함께 나와 장사를 하기에 두 사람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씨가 폭력과 절도 등 전과 9범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김씨의 전과 기록은 벌금형에 불과했지만 어린이 성추행 범죄를 저지르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생활을 하다 5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허양을 성추행하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번 허양 살인 사건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나서야 경찰청은 물론 정치권까지 야단법석이다. 경찰청은 성폭력범에 대한 보호관찰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고, 여당은 성범죄자들의 얼굴 공개는 물론 주거를 제한하는 방안을, 야당에서는 성범죄자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전자 팔찌 제도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 아동들을 치료해 온 전문가들은 객관적인 잣대로 성범죄자들의 특성을 분류하고 그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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