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빌라 털이범 이 아무개 씨(35)가 훔친 다양한 물건들. | ||
이 씨는 훔친 물건 가운데 수억 원 상당의 가치가 인정되는 우표집은 ‘짐이 된다’는 이유로 그냥 불태워 버렸으며 고급 동양 자수는 무엇인지 몰라 장물아비에게 그냥 공짜로 주어버린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씨는 주로 강북이나 경기 지역의 고급 빌라나 저층 아파트를 물색해 돈이 될 만한 것은 가리지 않고 훔쳐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대부분 보석류가 주를 이룬 훔친 물건들은 이미 처리한 뒤였지만 검거 당시 이 씨의 집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도난품들도 수십 종에 이르렀다.
이 씨는 부유층 전문 털이범다웠다. 그는 감정사들이 사용하는 감별 도구로 자신이 직접 값어치를 매기기도 했다. 훔친 귀금속 중에는 1천만 원 상당의 루비 메달, 스위스 시계 등 값비싼 보석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외국에서 들여온 양탄자, 조선 시대 백자, 희귀한 권총 등의 수집품들은 물론 외국 화폐, 양주 등도 이 씨에게는 돈이 되는 도난품들이었다.
하지만 부유층 전문 털이범에게도 낯설고 생소한 귀중품이 있었다. 지난 2004년 10월 공범들과 경기도 용인시의 한 빌라에 침입했을 때 훔쳐 온 우표집과 동양 자수. 10년 넘게 고급 빌라를 전문으로 털어온 이 씨였지만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우표가 수억 원이나 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일단 훔쳐 나오긴 했으나 15권이나 되는 우표집을 처리하기 귀찮아지자 하남시 자신의 집 근처 야산에서 한꺼번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경찰은 “우표집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가를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지만 피해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이 우표 집은 역사가 깊은 희귀 우표들로 시가 2억 원 상당이라고.
이때 함께 훔쳐 온 동양 자수는 장물아비에게 팔아넘기려고 했으나 “이런 것은 돈도 안 된다. 그냥 가져가라”는 소리를 듣자 그냥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물아비는 이 자수가 1억 원 상당의 고가품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 수사 결과 이 자수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 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자는 이 자수에 대해 “외국 수상에게서 받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수”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이 씨가 막상 진귀한 것인 줄 알고 훔쳐 온 도자기들 중에는 몇 천 원에 불과한 모조 장식품도 있었다고 한다.
강동 경찰서에 따르면 이 씨의 여죄를 추궁한 결과 현재까지 밝혀진 절도사건만 16건. 이 씨는 특별한 도구 없이 가스 배관이나 난관을 타고 뒤 베란다를 통해 고급 빌라에 침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서 이 씨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강남 지역은 무인 경비 시스템이 완벽한 반면 강북이나 용인, 분당 지역은 고급 빌라 밀집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도난 경보 장치를 설치하지 않은 주택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
이 씨가 털어놓은 범행 수법도 흥미로웠다. 우선 인터넷으로 고급 빌라를 검색해 목표물을 세운다는 것. 그리고 오후 3시쯤 자신의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나가 고급 주택가에 차를 세우고 기다린다고. 이 씨는 범행 목적으로 훔친 물건을 팔아 생긴 돈으로 일부러 고급 외제차까지 사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래야 부유층 동네에서 의심받을 소지가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
차에서 기다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불이 켜지면 작전은 실패. 불이 켜지지 않으면 빈 집이므로 바로 작전에 돌입했다. 경보 장치도 없고 뒤 베란다의 문까지 열려 있는 빌라가 이 씨 같은 고급 빌라 털이범들에는 아주 쉬운 범행 대상이 됐다.
이 씨는 2004년 4월 청송감호소에서 출소한 뒤 한 달 만에 다시 고급 빌라 털이범으로 전락했으며 “현상수배범이 하남에서 BMW를 타고 다닌다”는 제보를 받은 경찰의 수사 끝에 지난 13일 구속됐다. 이 씨는 지난해 말까지 7억 9천여만 원 상당의 귀중품들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