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천동 세 자매 피습 사건 현장. 이곳 2층에서 잠을 자던 세 자매가 참변을 당했다. | ||
지난 3월 27일 새벽에 발생한 봉천동 세 자매 피습 사건은 할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와 어머니 등 무려 8명의 식구가 한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깨어나기 전까지 아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세 명 모두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를 때까지 둔기로 머리를 내려치는 등 범행수법이 잔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범행 도구는 물론 단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이 일고 있다.
3월 29일 봉천 8동 치안센터에 설치된 수사본부에는 서울 관악경찰서 강력 6개 팀이 투입된 상태다. 수사 상황을 묻는 질문에 수사본부의 관계자는 “숨진 피해자들의 부검과 집 안에서 발견된 지문 감식을 의뢰해 놓은 상태”라며 “휴대폰 통화 내역이나 가족 등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펼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단서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건 발생 직후 가족들이 세 자매를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피해 현장이 훼손됐고 경황이 없어 누구를 먼저 업고 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더욱이 세 자매 중 둘은 이미 숨지고 셋째 딸마저 의식불명 상태이다 보니 충격에 빠져 넋이 나간 가족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수사도 펼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번 사건을 접한 이웃 주민들은 물론 취재 기자,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들조차도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세 자매를 상대로 한꺼번에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가족들이 그 같은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
한마디로 미스터리로밖에 볼 수 없는 지난 3월 27일 사건 발생일로 되돌아 가보자.
공사장 인부로 일하고 있던 세 자매의 아버지 김 아무개 씨(55)는 평소대로 새벽 4시 45분쯤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현관 바로 옆 아버지(79)의 방에는 아버지와 넷째 딸(11)이 잠을 자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던 김 씨가 아버지의 비명 소리에 놀라 나와 보니 거실 한쪽에 놓여있던 빨래 건조대에 불이 붙어있었다. 김 씨는 현관 밖으로 빨래 건조대를 내던졌고 수상한 생각이 들어 딸들이 자고 있던 방문을 열고자 했지만 안에서 잠겨 있었다. 누군가 안에서 잠가 놓은 것이었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방문이 잠겨 있어 보관 중이던 열쇠로 따고 들어가 보니 이불 위에 불이 붙어 있었고 세 딸 모두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새벽 5시경의 일이었다.
김 씨가 일어난 시각이 새벽 4시 45분. 고령의 아버지 방을 살핀 후 화장실에 간 사이 거실로 나온 아버지가 빨래 건조대에 불이 난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른 시간까지를 따져보면 범인은 단 몇 분 사이에 범행을 저질렀거나 그 전에 범행을 저지른 후 숨어 있다가 김 씨가 화장실에 간 사이 불을 붙이고 달아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범인이 김 씨의 세 딸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독주택 2층에 위치한 김 씨의 집은 방이 세 개에 화장실과 주방이 있는 구조다. 아이들의 할아버지와 넷째 딸이 자는 방은 현관에서 들어오자마자 바로 왼쪽에 위치하고 있고 그 옆으로 김 씨 내외와 아들(6)이 자는 방이 있다. 현관에서 들어와 거실을 가로질러 보이는 곳이 화장실, 그 옆이 바로 세 자매가 자고 있던 방이었다. 범인이 다른 방을 놔두고 세 자매의 방에만 침입한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던 것인지도 아직 오리무중이다.
8명의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 들어가 흉기가 아닌 둔기를 이용해 세 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그 사이 아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의문이다. 금품 등을 노리고 침입했다가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경찰은 원한, 금전관계, 치정 등에 의한 살인이 아닌가 수사를 벌이고 있으나 아직 그 동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수사 관계자는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세 자매가 자고 있던 위치와 피를 흘린 흔적을 보면 범인이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둔기로 내려쳤을 가능성이 있다”며 “또 반항의 흔적이 전혀 없고 베개가 피에 흥건한 것을 볼 때 세 자매가 자고 있는 상태에서 피습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는 이상 한 자매가 피해를 당하는 사이 다른 자매들은 어느 정도 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세 자매는 방문을 연 상태에서 보았을 때 첫째, 둘째, 셋째 딸의 순서로 잠을 자고 있었고 피해 정도 역시 그 순서에 비례했던 것. 범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처음 보이는 큰딸은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사망했고 둘째 딸은 병원으로 옮긴 다음 날 숨졌다. 문밖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셋째 딸이 유일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볼 때 가장 나중에 범인의 습격을 받았고 피해 정도도 약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셋째 딸이 유일한 목격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뚜렷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경찰은 현재 셋째 딸의 생존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셋째 딸의 상태도 위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사관계자는 “부검이나 지문 감식 결과가 나오려면 2주 후가 될 것”이라며 “그 전에 셋째 딸의 의식이 돌아온다면 수사가 급진전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셋째 딸마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세 자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한 이 일은 또 하나의 미제 강력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