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행정수도 건설이 좌절된 노무현 대통령의 반전카드는 무엇일까. 행정특별시나 행정타운 건설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여론의 향배에 따라서는 극적인 승부수를 띄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5월 청와대 본관 앞에서 담화문를 발표하는 모습. | ||
노 대통령이 현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 카드를 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행정타운 건설 등 현실적 대안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여권은 이번 헌재 평결을 개혁에 대한 보수층의 강력한 저항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할 가능성도 있다. 노 대통령는 과연 어떻게 ‘제2의 탄핵’ 사태를 극복해나갈까.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린 날, 열린우리당의 한 충청권 의원은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너무 화가 나서 국정감사 도중에 상임위원장의 양해를 구하고 지역구로 바로 달려갔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을 해서 낸 법안을 사법부가 한번에 뒤집어버리면 어떻게 입법활동을 하란 말인가”라며 목청을 높였다. 이 의원은 또한 헌재 평결 이후 전격적으로 열린 열린우리당의 의총 분위기를 전하면서 “절대 행정수도 건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전했다. 이런 격앙된 분위기를 반영하듯 여권은 헌재의 평결에 순순히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뒤 노 대통령은 지난 10월25일 이해찬 총리가 대독한 시정연설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유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결론의 법적 효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승복 논란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이 발언은 전격적인 수용이 아닌 우회적으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헌재 결정에 대한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수용 의사를 피력하지 않고 헌재의 최종적 판단에 따른 법적인 효력 발생만 인정하겠다는 것. 노 대통령이 헌재의 ‘관습헌법’ 인용에 대해 “처음 듣는 이론”이라고 반론을 펼쳤던 것처럼 이론의 여지는 많지만 헌법 판단의 최후 보루인 헌재의 권위를 존중, 일단 법적인 효력 부분을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헌재 결정을 ‘전면’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핵심이다. 일단 노 대통령은 헌재의 ‘법적인’ 판단을 존중하고 위헌 시비가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행정타운 건설 등의 우회로를 선택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습헌법’ 논란을 계속 유지해나가면서 여론의 향배를 본 뒤 전격적인 승부수를 띄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적인 카드는 전면적인 개헌이나 국민투표 전격 실시 등의 강경책이다. 헌재 평결 초반만 해도 노 대통령이 전면 개헌이나 국민투표 실시 등의 강경책을 들고나올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노 대통령이 신 행정수도 추진을 명확히 밝히고 대통령 중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까지 논의하는 포괄적 헌법 개정을 전격 발의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선 자금과 탄핵 등의 어려운 정국에서 보여온 노무현식의 승부사적 기질을 감안하면 충분히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가설이다.
▲ 지난 10월21일 ‘위헌’이라는 자막이 선명하게 나타난 청와대 춘추관의 TV. 청와대사진기자단 | ||
두 번째 카드는 국민투표 전격 실시다. 이는 헌법 전면 개정보다 정치적 부담이 덜 하고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구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해보는 방안도 있다. 이를 통해 찬성이 많이 나오면 ‘관습법상 서울이 수도다’라는 헌재의 평결에 대해 반론을 만들 수 있다. 국민들의 관습이 바뀐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는 열린우리당 충청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대안’이다.
하지만 헌법 개정이나 국민투표 모두 노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부담을 지울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만약 또 한번 정권에 반하는 결정이 내려질 경우 노 대통령이 그 정치적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 대통령 자리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레임덕 현상에 빠지는 것은 물론 여권의 각종 개혁 입법 작업도 심각한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런 정치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바로 청와대나 국회만 뺀 ‘행정특별시’ 건설이다. 헌재는 위헌 결정문에서 ‘수도는 대통령과 국회 등 헌법 최고기관의 소재지’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청와대와 국회 등을 제외한 모든 행정부와 주요 기관을 충청권으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행정타운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제2 과천청사처럼 일부 행정부처와 관련기관만 이전하는 것인데 한나라당도 이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전자는 청와대와 행정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업무 효율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후자는 새롭게 입지 선정을 해야 하고 규모가 작아 ‘생색만 내는’ 이전이 될 것이라는 등의 문제가 있다.
현재로서는 노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시간을 벌면서 여론 추이를 지켜본 뒤 다시 한번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승부수를 띄울 것으로 관측된다. 여기에는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관습헌법’에 대한 반론이 커지고 있고 흩어진 친노 세력이 결집하는 등 노 대통령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배경이 있다.
또한 여권은 신 행정수도 건설을 통해 지역연합을 결성, 2007년 대선에서 재집권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헌재의 이번 평결로 이 전략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차기 대선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번 헌재 평결에 대해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