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4년 2월 엄 아무개 양의 노제가 시신 발견장소에서 엄수되고 있다.연합뉴스 | ||
과연 엄 양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 또 대체 왜 죽였을까. 한때 베테랑 형사들로 이뤄진 수사전담본부까지 설치하고 대규모 경찰 인력을 수사에 투입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상황. 전모가 베일 속에 가려진 포천여중생 살인사건, 그 3년간의 수사기록을 따라가본다.
지난 2003년 인구 15만 명의 조용한 도시 포천이 발칵 뒤집혔다. 그해 11월 5일 당시 D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엄 아무개 양이 하굣길에 깜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실종 당일 엄 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뒤 집으로 향했다. 귀가 도중에 4명의 친구들과 한 친구집에 들렀던 엄 양은 오후 6시 18분에 어머니에게 “집에 곧 도착한다”고 전화를 걸었다. 이것이 엄 양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목소리였다. 어머니와 통화한 직후인 6시 19분께 엄 양의 휴대폰은 전원이 분리됐다. 그리고 엄 양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 했다.
일명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이 의문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은 처음에 단순 가출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엄 양이 가출할 이유가 없다며 애초부터 가출가능성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엄 양은 중학시절 내내 개근상을 받을 만큼 성실했고 ‘훌륭한 교사’가 되길 원하던 꿈 많은 소녀였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 양은 모범적이고 활달한 학생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경찰 수사는 처음과는 달리 납치사건 쪽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우선 엄 양의 실종 당일 행적부터 하나씩 탐문했다.
엄 양은 방과 후 친구들과 한 친구집에 들렀다가 오후 6시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조 아무개 양과 그 집을 나섰고, 둘은 소흘읍 송우리 추산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엄 양의 휴대폰 통화기록 및 전원이 분리된 시기 등으로 보아 친구 조 양과 헤어진 직후 그 일대에서 실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엄 양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불과 0.8㎞로 걸어서 10분가량 걸리는 거리다. 그러나 엄 양이 조 양과 헤어진 추산초등학교 부근은 가로등 하나 없는 외딴 길. 조 양은 경찰 조사에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변이 깜깜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찰은 엄 양의 평소 동선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통학로 주변과 야산 일대까지 훑고 엄 양의 휴대폰 통화내역도 추적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군인인 엄 양 아버지의 요청으로 군부대까지 수색에 동원됐지만 허사였다. 포천시내 곳곳에는 ‘신장155㎝, 체중 38㎏, 단발머리에 머리를 뒤로 묶음, D 중학교 교복 착용, 흰색 운동화, 분홍색 머리띠 착용’이라는 내용의 전단지 수만 장이 나붙었다. 하지만 목격자는커녕 단 한 건의 제보조차 들어오지 않는 등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엄 양의 실종이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진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인의 징후’는 엄 양의 유류품들이 발견되면서 포착됐다. 실종 23일 만인 11월 28일 엄 양의 휴대폰, 가방, 운동화가 경기 의정부시 민락동 도로공사 현장 근처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것. 범인은 마치 경찰 수사를 농락하듯 범행 후 엄 양의 유류품들을 쓰레기 위에 흩어놓고 사라졌던 것이다.
마침내 이듬해 2월 8일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 5리에 소재한 한 식당의 진입로변 배수관 안에서 엄 양은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엄 양의 유류품들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2㎞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 사체 발견 당시 현장 모습. | ||
하지만 실종 당일 엄 양이 입고 있던 교복과 속옷, 지갑 등은 현장 주변에서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또 혈흔이나 범인의 머리카락 등의 사소한 단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먼저 주목한 것은 범인의 대담한 범행수법이었다. 범인은 범행 뒤 엄 양의 소지품들을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띌 수 있는 장소에 보란 듯이 내다버렸을 뿐 아니라 사체 역시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인근 배수로에 유기했다. 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초저녁 시간에 범행이 이뤄졌다는 점도 범인의 대담한 성격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학교 인근에서 납치할 정도의 대담성, 그리고 엄 양이 혼자 되길 기다린 후 범행을 시도한 주도면밀함, 경찰 수사를 비웃는 듯한 유류품 떨궈두기와 사체 유기 수법 등으로 보아 범인은 초범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됐다.
경찰은 엄 양이 범인의 차량에 거부감없이 탔을 경우를 가정해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우범자나 엄 양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저인망식 수사에도 불구하고 용의점이 발견되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부검 결과에 적잖이 기대를 걸었지만 사체의 부패가 워낙 심해 외상이나 폭행, 결박 흔적조차 감별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따라서 구체적인 사인도 밝혀낼 수 없었다.
엄 양이 발견된 배수로에서 7~8m 정도 떨어진 또 다른 배수로에선 콘돔과 체모, 정액이 묻은 휴지조각이 발견됐으나 엄 양 사건과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애초 경찰은 엄 양이 나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에 주목, 성폭행 후 살해됐을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부검 결과 정액 음성 반응이 나왔고 사체에서 성폭행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국과수 측은 “사체의 부패 정도가 워낙 심해 사인과 사망시간을 알아내기도 어렵다. 정액에 대해 음성반응이 나왔지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고 확정짓기도 어렵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나타냈다. 경찰 역시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가 없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성범죄자의 범행일 가능성을 아직도 열어두고 있다.
▲ 지난 2004년 특별수사본부에 설치됐던 현장주변요도(위),사건 당시 차량 뒤에 붙인 전단지. 목격자는 나오지 않았다. | ||
경찰은 사체에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범인의 엽기 행각으로 보아 변태성욕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를 벌여왔다. 인근의 정신병자와 행려병자, 성범죄자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탐문수사를 했지만 좀처럼 용의자는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이 베일 속의 범인과 숨바꼭질을 한 지 어언 3년. 현재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여느 미제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 역시 관할서인 포천경찰서 형사들에게는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희대의 엽기살인사건으로 연일 언론에 보도됐지만 단서 하나 드러나지 않아 수사팀을 곤혹스럽게 했다. 또 그간 두 명의 경찰서장이 경질·파면되는가 하면 당시 사건을 맡았던 강력반장이 수사의 중압감 등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자살하는 등 악재가 겹치기도 했다.
지난 10월 18일 포천경찰서 담당 형사는 엄 양 사건에 대해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종결지을 수는 없다”며 “여전히 수사 중”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특별수사본부는 해체됐지만 포천경찰서는 여전히 전담반을 운영,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수사력을 다하고 있다. 경찰은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하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전담반에 따르면 엄 양 살인사건과 관련해 그 동안 단 한 건의 제보도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장난전화조차 없었던 것 때문에 베테랑 형사들의 입에서도 “이런 사건은 형사생활 동안 처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경찰은 주목할 만한 한 건의 제보를 접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담반을 꾸린 뒤 처음 들어온 이 제보에 경찰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제보 내용은 엄 양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건에 대한 것이지만 범행수법 등에서 유사점도 있어 일단 들춰보고 있다는 것이 담당형사의 귀띔이다.
과연 경찰은 얼굴 없는 범인의 윤곽이라도 그려낼 수 있을까.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