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4년 5월 2일 충남 서천 Y 카센터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수색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웃 여인과 카센터 주인의 쌍둥이 자녀 사체가 발견됐지만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연합뉴스 | ||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서 대체 누가 왜 이처럼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서천 카센터 살인사건 속으로 다시 들어가 봤다.
사건은 2004년 5월 2일 새벽 1시 40분께 서천의 Y 카센터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사건이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순식간에 5칸 가게 건물을 모두 태우고 2시간 만에 진화된 화재현장에서는 카센터 주인의 쌍둥이 자녀(당시 8세)와 이웃 농기계상 여주인(당시 40세)의 사체가 발견됐다. 처음에는 단순 화재사고로 보였던 이 사건은 며칠 후 다른곳에서 카센터 여주인(당시 43세)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살인사건으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센터 내부가 거의 소실된 데다가 진화 과정에서 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경찰은 처음부터 증거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경찰이 당시 조사한 사건 전후 정황부터 살펴보자.
농기계상 여주인은 이날 새벽 1시께 이웃의 카센터 여주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농기계상 여주인의 아들(당시 17세)은 경찰 조사에서 “어머니는 ‘카센터 아저씨가 낚시를 갔다오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니 가봐야겠다’는 말을 하고 급히 외출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농기계상 여주인이 집을 나선 지 50여 분 만에 카센터는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 진화 뒤에 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는 모두 세 구. 하지만 정작 카센터 여주인의 행방은 묘연했다.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카센터 여주인은 사건 발생 8일 후인 5월 10일 화재 현장에서 약 11㎞ 떨어진 서천군 기산면 용곡리 길산천의 다리공사 현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목에는 예리한 흉기에 찔린 상흔이 나 있었고 하의는 벗겨진 상태였다.
경찰은 사체가 길산천을 따라 떠내려온 것으로 보고 상류 쪽을 수색한 결과 사체 발견 지점으로부터 1.7㎞ 떨어진 봉선저수지 부근에서 카센터 여주인의 피 묻은 트레이닝복 상의와 점퍼를 찾아냈다. 인근 수로로 이어지는 부분의 풀숲에 무거운 물체에 쓸린 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인이 이 곳에서 카센터 여주인을 살해한 후 사체를 수로에 버린 것으로 추정됐다.
강력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의 주변사람들이 1차 수사 대상에 오르게 마련. 경찰은 우선 카센터 여주인의 남편 K 씨(47)의 당일 행적부터 추적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K 씨는 사건 발생 전날 밤 9시부터 당일 새벽 3시께까지 논산 강경읍에서 밤낚시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동행자의 진술과 당일 통화기록을 추적한 결과 명확한 알리바이가 성립됐던 것. 물론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 통화 속의 ‘전언’도 사실이 아니었다.
경찰은 멀쩡하던 카센터에서 농기계상 여주인이 도착한 뒤 돌연 화재가 발생한 점, 카센터 업주 K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무근의 전화가 걸려왔던 점, 당시 전화를 걸었다는 카센터 여주인은 정작 외부에서 살해된 점 등으로 보아 방화사건과 살인사건은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건 현장과 사체 유기 장소에 대한 여러 차례의 정밀 수색과 대대적인 탐문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될 만한 물증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이 현장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은 데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카센터를 방화할 정도로 용의주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단서는 크게 세 가지. 첫 번째는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남성용 허리띠 버클이다. 무궁화 속에 태극기가 그려진 이 버클은 카센터 업주의 것도, 이웃 농기계상 주인의 것도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누군가 농기계상 여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던 과정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분명 늦은 시각 카센터에 ‘누군가’ 방문했고 ‘무슨 일’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문제의 버클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 제작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경찰은 버클의 주인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해왔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는 상태다.
▲ 카센터 옆 가게를 찾은 젊은이들의 목격담과 제보 등을 토대로 작성한 용의자 몽타주.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다. | ||
오히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범인이 농간을 부렸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경찰은 발신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조사를 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세 번째는 사건 당일 밤 카센터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명의 남녀에 대한 목격담이다. Y 카센터 옆에는 동네 젊은이들이 자주 와서 놀다 가곤 하는 카오디오센터가 하나 있었다. 경찰은 이곳에 들렀던 젊은이들을 상대로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해 조사한 결과 ‘사건 당일 밤 12시쯤 175㎝ 정도의 키에 하얀 모자를 쓴 마른 체격의 남자 한 명이 카센터 여주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러나 당시 카센터를 방문한 사람이 예의 남성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추가 제보가 들어왔다. ‘밤 12시쯤 여자 1명과 남자 2명 정도로 추정되는 일행이 카센터를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일행 중 또 다른 남성은 40~50대로 180㎝ 정도의 키에 우람한 체형, 우락부락한 얼굴이었으며 여성은 30~40대로 둥근 얼굴에 단발형 머리를 하고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새벽 1시쯤 카센터 앞에서 이들을 포함한 3~4명이 심하게 다투는 모습도 목격됐다고 한다. 하지만 몽타주까지 작성해 전단지를 돌렸지만 이들의 신원과 행적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당시 카센터 업주 K 씨가 부재 중이었던 점과 방문 시각이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일 때문에 카센터를 찾았을 개연성은 희박해 보인다. 또한 평소 카센터 여주인이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유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이들 중 최소 한두 명은 카센터 여주인과 안면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경찰은 목격자의 제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들 일행이 범인이거나 범인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의 경찰 수사 결과를 종합해보면 △범인(들)은 카센터 업주가 낚시를 간 것을 사전에 알고 늦은 시각에 계획적으로 카센터를 방문했으며 △카센터 여주인은 농기계상 여주인을 불러 카센터를 맡긴 뒤 범인을 따라 나갔다가 살해됐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밤에 전화로 불려간 농기계상 여주인은 대체 왜 살해된 것일까. 경찰은 화재 현장에서 사체로 발견된 농기계상 여주인의 기도에서 그을음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점, 별다른 몸부림의 흔적도 없이 반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점 등으로 보아 범인이 농기계상 여주인을 살해한 후 현장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범인이 자신의 방문을 목격한 농기계상 여주인과 쌍둥이 남매를 살해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불을 질렀을 가능성, 아니면 범인과 농기계상 여주인과의 어떤 갈등이 살인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일당들의 표적에는 애초부터 카센타 여주인뿐만 아니라 농기계상 여주인까지 포함돼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특히 화재 직전 걸려온 ‘카센터 업주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 내용이 거짓임이 밝혀짐에 따라 카센터 여주인이 농기계상 여주인을 불러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당시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카센터 여주인이 맞다면 왜 밤 늦은 시간에 있지도 않은 남편의 사고를 핑계로 다급히 농기계상 여주인을 불러들였을까. 여기에는 범인과 카센터 여주인, 농기계상 여주인만 아는 사연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사건 직전 카센터에서 목격된 남녀 일행 중 30~40대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고 새벽에 카센터 앞에서 서너 명의 남녀가 다투고 있었다는 제보 내용.
이 같은 정황으로 보아 금전이나 이성 문제로 다툼이 일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경찰은 두 여인의 지난 행적을 파악하는 동시에 주변사람들을 상대로 저인망식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살해된 두 여성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소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을 하거나 채무관계나 치정이 얽힌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두 여인이 대체 왜 범인의 표적이 됐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우발적인 타툼이 빚어낸 살인이 연이은 죽음을 부른 것일까. 그러나 살인 및 방화가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계획된 범행’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게 범죄전문가들의 견해다.
경찰 수사와 제보 내용 등을 토대로 추정할 수 있는 범인의 윤곽은 ‘적어도 1명 이상의 공범이 있다’ ‘방화범과 살인범은 동일인물이거나 일당이다’ ‘범인 일당 중 지역사정을 잘 알거나 피해자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것 정도다.
서천경찰서 관계자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범인 검거 및 진상 파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그러나 아직까지 추가 제보나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카센타 여주인의 유가족 A 씨는 “사건 이후 우리는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니었다. 곧 언니의 생일이 돌아오는데…”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날 카센터를 방문한 남녀 일당을 본 목격자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범인은 분명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또 반드시 잡힐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작은 제보 하나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살리는 길임을 알고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죽은 이가 꿈에라도 나타나 진실을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경찰과 유가족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진 상황. 운명의 그날 서천의 카센터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