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점에서 지난 2004년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괴이한 살인사건은 ‘잔혹 살인’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피해자인 20대 초반의 여대생은 얼굴 전체가 노란색 테이프로 칭칭 휘감긴 채 질식사한 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이 사건은 상식을 벗어난 살해방법 때문에 유가족과 경찰은 물론 온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2년 2개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희대의 사건은 ‘미제 사건’ 파일 위에 여전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범인은 엽기적인 범행수법과는 대조적으로 현장에 단서 하나 남기지 않은 철두철미한 지능범이었다. 경찰 수사가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과연 ‘테이프’ 뒤에 숨어 있는 범인의 실체를 밝혀낼 수는 없는 것일까. 다시 한번 ‘광주 여대생 테이프 피살사건’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 2004년 9월 14일 오후 8시 30분께 광주 용봉동의 한 아파트 단지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한 여대생이 자신의 침실에서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광주 북부경찰서 형사들은 사체를 본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피해자는 사건 당일 혼자서 집을 보고 있던 여대생 손 아무개 씨(당시 23세). 손 씨는 하의가 벗겨지고 손과 발이 묶인 채 죽어 있었다. 당시 손 씨의 어머니는 “일을 보고 돌아와보니 딸 아이가 피를 흘린 채 작은 방 침대위에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반나절이 지난 듯 몸이 굳어 있는 상태였다. 거실 곳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물품들과 혈흔 자국들만이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형사들이 경악한 이유는 손 씨의 얼굴 전체에 휘감겨 있던 테이프 때문이었다. 손 씨의 얼굴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빈틈없이 노란 비닐테이프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외국의 잔혹 범죄극이나 공포영화에나 나옴직한 모습이었다.
테이프는 여러 방향으로 겹쳐져 매우 거칠게 감겨 있어 범인이 무척 흥분되고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이 같은 행위를 저질렀음을 짐작케 했다. 당시 현장을 방문했던 경찰 관계자는 “그간 갈갈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사체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얼굴 전체가 노란 테이프로 휘감긴 손 씨의 모습은 여느 사체들보다 더욱 참혹했다”고 회상했다.
경찰이 품은 가장 큰 의문은 ‘왜 하필 테이프로 얼굴을 감아 죽였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향후 수사 방향을 정하는 데 키포인트로 작용했다.
얼핏 보면 이 사건은 전형적인 강도살인사건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즉 ‘금품을 목적으로 침입한 강도가 자신의 얼굴을 본 주인을 성폭행해 입막음을 하려다 거세게 반항하자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경찰은 애초부터 면식범에 의한 계획범행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집안의 금품이 거의 없어지지 않은 점, (범인이) 현관문을 통해 침입한 점, 흉기를 사용하지 않은 점, 식구들이 외출한 시간을 간파하고 있었던 점, 엽기적이고 어려운 살해방법을 사용한 점 등으로 보아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는 것이 경찰의 입장이었다.
또 경찰은 범인이 굳이 테이프로 얼굴을 감아 죽이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원한에 의한 살인 가능성도 제기했다. 사라진 금품이 거의 없고 성폭행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범인에게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얼굴을 감는 데 사용한 노란 테이프는 손 씨의 집에 있던 것이 아니라 범인이 사전에 준비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또 테이프에 지문조차 남아 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볼 때 범인은 비닐장갑이나 고무장갑을 끼고 범행을 한 것으로 추정됐다. 결국 이 같은 점들은 이번 사건이 명백한 ‘계획범행’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도대체 누가 손 씨를 죽인 걸까. 또 왜 이렇게 잔인한 수법을 사용한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만 아직까지 밝혀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뭔가 놓친 부분은 없을까. 당시 수사기록을 토대로 한 번 더 사건 현장을 더듬어보자.
사건 당일 오전부터 손 씨는 혼자 집을 보고 있었다. 손 씨의 집은 13층으로 현관문을 통하지 않고는 침입이 불가능한 구조다. 창문이나 베란다를 통해 침입한 흔적도 없어 경찰은 범인이 현관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관 출입문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전자식 자동잠금장치가 장착돼 있었는데 이것 역시 파손된 흔적이 없었다. 이는 손 씨가 직접 문을 열어줄 만큼 잘 아는 사람이나 비밀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의 소행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국과수는 손 씨의 사체가 굳어 있는 정도와 거실에 손 씨의 혈흔이 말라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사망시간을 오전 9시~10시께로 추정했다. 범인은 가족들이 그 시간에 집을 비워 손 씨가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전 시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손 씨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나 복도 등에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던 것도 경찰 수사를 어렵게 한 부분.
국과수 부검 결과 손 씨의 사인은 테이프로 인한 질식사로 판명됐다. 하지만 현장 조사에 따르면 범인은 즉시 손 씨를 제압하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거실에는 손 씨의 족적과 피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경찰은 손 씨의 얼굴과 머리 부분에서 심한 구타 흔적이 발견된 점과 집 안에 혈흔이 남아 있던 점으로 보아 범인과 손 씨 간에 격렬한 실랑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애초 경찰은 손 씨의 하의가 벗겨져 있었던 점을 들어 성폭행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으나 부검결과 성폭행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성폭행을 하지 않았음에도 하의를 벗겨놓은 것을 두고 경찰 내부에서는 ‘강간을 시도하려다가 증거가 남을 것을 두려워한 범인이 중도에 포기했거나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일부러 남긴 트릭’이라는 가정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범인의 목적이 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정액 음성반응이 나타난 것과 현장 정황으로 보아 일단 강간도 목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문의 핵심은 왜 범인이 손 씨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양손과 양발을 묶은 다음 테이프로 얼굴을 감아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는지로 모아진다. 우발적인 살인이라면 범인은 간단한 방법으로 손 씨를 살해한 뒤 현장을 떠났어야 했다. 용이한 살해방법을 두고 굳이 어렵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는 대개 원한에 의한 살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경찰의 전언이다. 실제로 한 경찰 관계자는 “과거 엽기적인 방법으로 애인을 살해한 남성이 검거된 후 ‘그냥 죽이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라는 말을 했을 때 인간이 원한을 품으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범행수법의 엽기성으로 보아 경찰은 이 사건 역시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스물세 살에 불과한 평범한 여대생이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게 할 만큼 원한을 살 일이 있을 리도 만무. 경찰은 손 씨의 주변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조사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손 씨 본인은 물론 가족과 원한을 맺을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도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손 씨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조회하는 한편 컴퓨터 및 이메일까지 검색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해 왔다. 면식범이 아닐 가능성에도 대비, 사건 당일 손 씨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택배 및 음식점 배달원, 세탁소 종업원 등을 상대로도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태다.
경찰을 가장 난감하게 만든 것은 피해자의 혈흔이 곳곳에서 발견될 정도로 범행 현장이 ‘난잡’했음에도 범인에게 다가갈 만한 아무런 단서나 증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범인은 현장에 자신의 족적이나 지문은 물론 머리카락을 비롯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 경찰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당시 경찰은 ‘고감도 특수조명기’까지 동원하고도 범인의 족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 수사 관계자는 “어떤 경우라도 범인이 조금의 족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사건 현장에서 족적은커녕 족적을 지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며 “이는 이 사건이 철저한 계획범행이며 범인이 매우 뛰어난 지능범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치밀하고 엽기적인 범행수법으로 보아 전과자나 지능범, 여성혐오증 또는 성도착증 환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감안해 다각도로 수사를 진행했지만 용의자를 좁히는 데는 실패했다.
특이한 사실은 범인이 범행 뒤 손 씨의 휴대폰을 가져간 점이다. 경찰은 “집 안의 다른 물건은 그대로 두고 손 씨의 휴대폰만 가져간 것으로 보아 휴대폰에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단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치 추적결과 손 씨의 휴대폰은 사건 당일 오후 남구 월산동 동신대 한방병원 인근에서 전파가 확인됐을 뿐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수사기록을 종합해볼 때 몇 가지 가정해볼 수 있는 것은 ‘범인은 손 씨가 직접 문을 열어줄 만큼 가까운 사람이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이다’ ‘범인은 손 씨가 혼자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한이나 오해로 인해 응징을 작정하고 손 씨를 찾아갔다’ ‘소액의 현금(1만 3000원)만 없어진 것으로 보아 돈이 목적은 아니다’ ‘하의를 벗긴 것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함이다’ ‘테이프와 장갑 등을 준비한 것으로 보아 계획범행이다’ 정도다.
하지만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며 범인 검거를 자신했던 경찰도 이제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고개를 내젓고 있는 상황. 경찰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시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놓여 있다.
수사에 진전이 없자 손 씨의 가족들은 용하다는 역술원까지 찾아가 범인의 행적을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유가족이 ‘범인은 2명이다’ ‘남쪽에 범인이 있다’ ‘주변인물이다’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찰에 알렸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간 여대생의 한풀이는 이제 고스란히 경찰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상태다. 범인을 잡기 위해 역술원 문까지 두드렸던 유가족의 절규는 오늘도 경찰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