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익산경찰서를 찾았을 때 사건을 담당한 최종호 형사과장은 마침 현장검증을 마치고 막 들어오는 길이었다. ‘신속하게 해결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묵념으로 현장검증을 시작했다는 최 과장은 어이없이 희생된 황 씨에 대해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한 달에 걸쳐 잠복과 미행을 반복하며 완전범죄를 노린 범인들의 파렴치한 범죄 행각을 언급할 때는 여전히 치가 떨리는 듯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형 아무개 씨(35)와 신 아무개 씨(31)는 20대 시절 교도소 동기로 만나 인연을 이어오던 사이. 출소 뒤 다시 조우한 두 사람은 지난 1년여 동안 직업도 없이 전북 익산 일대를 떠돌며 지내고 있었다. ‘하루살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잦은 수감생활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이들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무기력함과 세상을 향한 막연한 증오뿐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막막한 생활의 연속. 지난 8월 중순경 다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의 대화는 여느 때처럼 신세한탄으로 이어졌다.
돈 벌 궁리를 거듭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은밀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며 지나가는 여성 운전자가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질시 반 부러움 반으로 무심코 주고받은 말에 두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빛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막연히 ‘한탕’을 꿈꾸던 두 사람에게 여유롭게 고급 외제차를 모는 여성 운전자의 모습은 범죄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외제차를 모는 사람은 나이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부를 갖추고 있는 부류로 여겼다. 젊은 여성은 부모를 잘 만나서, 유부녀는 남편을 잘 만나서 호강하는 ‘특혜’받은 계층으로 인식됐던 것.
두 사람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범행계획을 공모하게 된다. 우선 범행 타깃은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모는 여성으로 정했다.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저항력이 약한 여성을 범행대상으로 삼는 것이 한결 수월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건의 전과가 있었던 이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외제차를 몰되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여성을 고른다’ ‘평소 생활패턴 및 동선이 일정한 여성을 대상으로 삼는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상대를 관찰한 후 착수한다’ ‘돈을 뺏은 즉시 살해한다’ 등의 ‘범행수칙’을 세웠다. ‘살해’에 대해서는 둘의 의견이 갈렸지만 결국 뒤탈을 막기 위해 ‘당일 즉시 살해’하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
‘완전범죄’를 꿈꿨던 이들은 범행 시나리오를 짠 뒤 철저하게 서로의 역할을 분담했다. 각자 맡은 역할을 얼마나 정확하게 실행에 옮기느냐에 따라 범행의 성공 여부가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납치와 살해까지 두 사람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궁리 끝에 교도소 동기인 장 아무개 씨(31)를 끌어들이기로 한다. 장 씨에게는 “위자료로 10억을 받아 현금을 엄청 많이 갖고 다니는 여자가 있으니 같이 한 건 해보자”라는 거짓말로 설득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던 장 씨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본격적인 범행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차에 타려는 순간 조수석으로 밀치고….” “소리 지르지 못하게 뒤에서 입부터 막으란 말이야.” “내가 여자를 잡고 있으면 ○○가 묶고 △△이는 카드를 뺏어.” “비밀번호를 받는 즉시 없애버리자구.” “나랑 ○○가 (시신을) 묻을 동안 △△이는 돈을 찾아와.”
이들은 순서대로 연습하면서 범행에 이용한 차를 버릴 장소와 여성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할 장소까지 미리 답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범행대상을 찾는 것 뿐이었다. 이들은 밤낮없이 익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벤츠(BENZ)나 베엠베(BMW), 아우디(AUDI) 등 고급 외제차를 타는 여성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범행대상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평소 생활패턴이 일정한 여성일 경우 적당한 틈을 타서 행동을 개시하면 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동시간이나 장소가 불규칙했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한 여성을 발견하고 기다렸지만 며칠 동안 여성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거처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주거가 부정확한 경우, 미행 중에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우, 매번 누군가와 동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외제차를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그 여성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범행대상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여성들이 여럿이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계속 허탕만 치던 이들 3인조는 지난 8월 말 BMW를 몰고 지나가는 한 중년여성을 발견했다. 바로 이들의 마수에 희생되고 만 약사 황 씨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준수한 외모에 기품 있는 차림새의 황 씨는 확실히 ‘있는 집 여자’로 보였다.
매일 아침 황 씨가 아파트에서 나와 향하는 곳은 익산시 부송동에 있는 약국. 황 씨가 약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그녀가 상당한 현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범행대상으로 낙점했다. 잠복을 거듭하며 황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기간만 대략 한 달여. 이들이 황 씨를 미행한 횟수만도 스무 번이 넘었다. 이들은 황 씨가 약국 문을 닫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물론이고 황 씨의 생활반경 및 스케줄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사건 당일인 9월 28일도 이들은 약국 뒤편 아파트 주차장에서 황 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정오쯤 황 씨는 오후 2시에 영등동의 단골 미용실에 예약이 되어 있다며 약국을 나섰다. 이들은 주차장으로 오는 황 씨를 발견했다. 그날을 ‘D-day’로 정한 이들은 평소 연습했던 대로 황 씨가 차문을 여는 순간 그녀를 조수석에 밀어넣고는 핸들을 잡고 황급히 현장을 떠났다.
황 씨를 납치한 이들은 사전 답사한 익산시 춘포면의 한적한 농로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띌 경우를 대비, 미리 제작해놨던 위조 차량 번호판을 황 씨의 차량에 바꿔 달았다. 하지만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황 씨의 지갑에 들어있던 돈은 고작 7만 원. 황 씨를 결박한 이들은 갖은 협박을 가해 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황 씨는 소지하고 있던 여러 개의 카드 중 현금 인출이 가능한 카드를 지목, 순순히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러나 실제로 인출 가능한 돈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 은행 폐쇄회로에 찍힌 장 씨의 현금 인출 모습. | ||
하지만 순순히 카드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풀어줄 거라는 황 씨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애초부터 이들은 ‘즉시 살해’를 계획해왔던 터였다. 일당 중 신 씨가 ‘어떻게 할까’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형 씨는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살해를 지시했다. 이에 신 씨는 살려달라는 황 씨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8분여에 걸쳐 황 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납치에서 살해까지 걸린 시간은 두 시간에 불과했다.
황 씨의 숨이 멈춘 것을 확인한 이들은 몇 시간 동안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다니다 익산에서 15㎞ 정도 떨어진 군산시 나포면의 인근 야산으로 가 황 씨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두 사람이 황 씨를 암매장하던 그 시각, 현금 인출을 담당한 장 씨는 미리 봐두었던 익산 영등동의 한 은행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선 그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현금인출을 시도했으나 ATM 비밀번호를 알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그는 이어 익산시 약촌동의 한 은행에서 다시 인출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 시간을 보내던 그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다시 영등동의 은행 자동화 코너로 돌아와 신용카드로 280만 원만을 인출했다. 이날 밤 10시경 장 씨와 합류한 일당은 현금을 나눠가진 뒤 각자 헤어졌다.
한편 반나절 이상 황 씨와 연락이 두절되자 황 씨 집은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이날 저녁 9시 반께 익산경찰서로 황 씨의 남편이 찾아왔다. 그는 “미용실에 간다며 정오에 약국을 나선 아내가 저녁 9시가 되어도 귀가하지 않고 있다”며 ‘미귀가자 신고’를 했다. 경찰은 즉시 황 씨가 소유하고 있다는 6개의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조회했지만 인출 내역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황 씨가 거래하는 14개 시중은행 및 금융 계좌에 대한 추적을 의뢰했지만 역시 거래내역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황 씨 앞으로 수령이 가능한 9억 5000만 원의 보험금과 주유카드까지 조사했지만 허사였다.
경찰은 황 씨의 남편을 비롯, 황 씨가 주로 접촉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수사를 벌이는 동시에 그들의 통신 내역과 금융계좌까지 추적했다. 또 전국 톨게이트의 입출 내역까지 확인, 황 씨 차량의 소재파악에 나섰지만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다. 추석 연휴 때도 쉬지 못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황 씨의 행방을 추적한 경찰로서는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황 씨가 실종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사건은 해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익산 근방에는 청부살인 등의 흉흉한 소문만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경찰은 황 씨 명의의 카드가 한 장이 더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문제 카드의 사용내역을 조회한 결과 황 씨가 실종된 9월 28일 280만 원이 인출된 기록이 확인됐다.
마침내 11월 22일 경찰은 은행 CCTV 화면을 통해 사건 당일 오후 8시 38분경 장 씨가 약 10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현금을 인출하는 장면을 확보했다. 용의자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용의자가 공개수배된 이튿날 대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찍힌 남자가 아는 사람 같다는 것이었다. 이 제보를 토대로 24일 익산의 한 목욕탕에서 장 씨를 검거한 경찰은 범행사실을 추궁, “나는 돈만 인출해줬고 죽이지는 않았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경찰은 장 씨의 휴대폰 통화내역 등을 조회, 다음날 나머지 일당 두 명을 익산 시내의 PC방과 여관에서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은 25일 주범 형 씨와 신 씨에 대해 강도살인 혐의로, 장 씨를 납치 강도 혐의로 각각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무려 두 달간 경찰과 유가족의 애를 태웠던 실종사건은 결국 납치살인이라는 끔찍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유족들은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유족들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며 경찰 수사에 의혹을 제기했다.
우선 범인들이 황 씨를 납치 두 시간 만에 살해했다는 대목이다. 유가족들은 “상식적으로 돈을 인출한 다음 살해하는 것이 순서인데 범인들이 비밀번호를 받자마자 살해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찰 역시 처음에는 이 부분을 납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결과 범인들이 돈이 인출되는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살해한 데는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범인들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황 씨에게 수십 번이나 기습적으로 비밀번호를 물어 확인을 거듭했다고 한다. “황 씨가 만약 거짓 비밀번호를 댔을 경우 자신이 말한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협박을 해가며 기습적으로 여러 번 확인했는데도 황 씨가 동일한 번호를 말하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는 게 범인들의 진술이었다. 또 황 씨를 계속 데리고 다닐 경우 노출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애초부터 황 씨를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황 씨 역시 거짓 비밀번호를 댔을 경우 더 큰 해코지를 당할까봐 번호를 알려줬을 것이고, 또 돈이 인출되는지 보기 전에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터였다.
두 번째 의혹은 겨우 현금 280만 원 때문에 살해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이들은 마이너스 통장에 있는 3000만 원을 염두에 뒀다. 마이너스 통장 인출을 시도했지만 두 개의 비밀번호가 필요한 것을 몰라서 실패한 것”이라 설명했다.
“살려 보내주기만 한다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다”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범인들이 납치 두 시간 만에 황 씨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가족은 물론 지역주민들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특히 경찰이 가족들 말만 듣고 문제의 카드 존재를 뒤늦게 파악해 범인의 조기 검거에 실패한 데 대해 유가족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또 황 씨의 차량이 삼례 일대의 아파트촌에서 여러 번 목격됐다는 제보가 전해지자 범인들이 범행 후에도 황씨의 차량을 몰고다닌 것을 간파하지 못한 경찰의 허술한 수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최종호 형사과장은 “황 씨의 카드가 6개가 아닌 7개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것은 우리의 실수라는 것을 인정한다. 범인 검거가 늦어진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어 “야심한 밤, 한적한 곳에서만 납치가 일어나는 시대는 지났다”며 “범인들이 한 달 동안이나 자신을 미행하면서 납치를 계획했다는 것을 황 씨가 어떻게 알았겠느냐”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