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9월 24일 백선기 경사 영결식 모습. 사라진 권총의 행방을 찾는 것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푸는 열쇠다. 연합뉴스 | ||
실제로 지난 2002년 추석 연휴 당시 파출소에 근무 중이던 한 경찰관이 누군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난자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치안 1번지’라 할 수 있는 파출소 안에서 벌어진 이 어이없는 참극에 경찰과 시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 123일 만에 경찰은 20대 청년 3명을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했지만 결정적인 증거 확보에 실패, 이들이 무혐의로 풀려나면서 결국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제’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 사건은 경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악몽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는 경찰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사건은 지난 2002년 9월 20일 0시 50분께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암2파출소 안에서 부소장 백선기 경사(당시 54세)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추석 연휴 첫날인 이날 파출소에선 소속 경찰관 4명이 2인 1조로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고 때마침 백 경사는 혼자 파출소를 지키던 중이었다. 근무 교대를 위해 파출소로 돌아온 동료가 책상 위에 쓰러져 있는 백 경사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발견 당시 백 경사는 목과 가슴 등을 예리한 흉기로 여섯 군데나 찔려 많은 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다. 또한 백 경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38구경 권총도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경찰은 실탄 4발과 공포탄 1발이 장전된 이 권총을 범인이 탈취해 간 것으로 판단했다. 범인이 권총을 이용해 제2의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범인이 치안 일선인 파출소 안에서 이토록 잔인한 살인극을 저지른 까닭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경찰은 이 사건을 공권력은 물론 지역주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행위’로 여기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어이없게 동료를 잃은 경찰로서는 조직의 자존심과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수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백 경사 개인에 대한 원한으로 인한 범행일 가능성이었다. 경찰은 백 경사가 무려 여섯 군데나 흉기에 찔려 잔인하게 살해된 점으로 보아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동료 경찰관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임에도 범인이 파출소 내에서 여러 차례 흉기를 휘두른 점도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해줬다.
두 번째는 관내 단속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자의 우발적인 범행일 가능성. 경찰은 파출소에 접수되는 사건사고들이 잡다하고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불법행위를 단속하거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범법자나 이해 당사자와 담당 경찰관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 따라서 경찰의 업무 처리에 불만을 품은 사람에 의한 우발적 범행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실제로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 백 경사가 한 여성 민원인과 말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사실을 파악하고 이번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는 데 주력했으나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세 번째는 애초 총기 탈취가 목적인 범인이 권총을 빼앗기 위해 계획적으로 백 경사를 살해했거나 권총을 빼앗는 과정에서 실랑이 끝에 우발적으로 백 경사를 살해했을 가능성이었다. 만약 이 가설대로 범인이 2차 범행을 노리고 권총을 탈취한 것이라면 추가 총기 범행이 예상돼 경찰로서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병력 500여명을 투입, 사건 현장인 금암파출소와 주변 도로, 백 경사의 자택, 예상 도주로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목격자가 없어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파출소 안에는 CCTV가 설치돼 있었지만 작동되지 않아 사건 정황과 범인의 인상착의를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
경찰은 우선 파출소 인근에서 밤영업을 하는 상점주인들을 대상으로 목격자 확보에 나서는 한편 백 경사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또 면식범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이 아니라 의외의 인물에 의한 우발적 범행일 수도 있다고 보고 인근 불량배와 정신병자, 전과자, 최근 출소자 등 300여 명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백 경사 주변이나 우범자 무리에 대한 수사에서도 단서가 될 만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기동대원을 포함해 연인원 2만 명이 동원돼 수사가 진행됐음에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자 경찰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사건이 장기화될 조짐마저 보였다. 소중한 동료를 잃었다는 슬픔마저 뒤로하고 수사에 집중해온 경찰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 개월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던 경찰 수사는 그 이듬해 1월 중순 20대 초반의 남성 3명이 차례로 체포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 경찰은 특수절도 혐의로 조 아무개 씨(당시 21세)와 공범 박 아무개(21), 김 아무개 씨(21·당시 현역 군인) 등 3명을 며칠 간격으로 검거했다. 전주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함께 음식물을 훔친 혐의였다. 하지만 조 씨 등을 조사하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경찰이 이들의 여죄를 추궁하던 과정에서 백 경사 피살 사건과 관련 있는 듯한 미심쩍은 정황들을 발견하게 된 것. 그로부터 얼마 뒤 경찰은 이들 3명으로부터 백 경사 피살사건에 대한 범행 일체를 자백받게 된다. 사건 발생 123일 만의 일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조 씨 등은 중학교 동창 사이로 사건이 일어나기 넉 달 전인 5월 22일 전주시내에서 무면허 상태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다가 백 경사의 단속에 걸려 오토바이를 압수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사건 당일 압류된 오토바이를 찾으러 파출소에 들어갔다가 마침 혼자 근무 중이던 백 경사와 시비가 붙었다. 그리고 실랑이 과정에서 홧김에 백 경사를 흉기로 살해하고 권총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은 범행 후 이들이 사건 현장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는 빈집에서 은신해왔다는 진술도 받아냈다. 조 씨 등은 검거되기 전까지 전주시내 식당과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절도행각을 벌여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억울하게 순직한 백 경사 피살사건은 조 씨 등이 범행을 자백함으로써 사건 발생 4달여 만에 해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경찰은 다시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조 씨 등에 대한 조사로 얻은 심증과는 달리 이들의 범행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 자백 이외에는 범인으로 확정할 만한 구체적 물증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범인이 가져간 권총과 살해에 사용된 흉기의 행방이었다. 경찰은 병력 1000여 명을 동원, 전주시내 일대를 샅샅이 뒤지는 한편 인적이 닿지 않는 하수구나 화장실 물탱크, 건물 옥상 및 인근 야산에서까지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권총이나 흉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또 혈흔이 묻어 있는 옷가지나 유류품 등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용의자로 지목됐던 조 씨 등은 조사 과정에서 경찰의 구타와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을 했다며 애초의 자백을 번복하기에 이른다. 그동안의 경찰 수사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와중에 당시 몇몇 언론은 조 씨 등 3명이 용의자로 지목된 과정과 경찰 수사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경찰 측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폭력으로 허위자백을 유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에 강력히 반발해 “증거를 찾아내 살인혐의로 기소되도록 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경찰은 증거물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만다. 용의자를 검거해 현장검증까지 마쳤음에도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살인 혐의를 적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용의자들의 결백 주장은 경찰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결국 용의자 3명 가운데 2명이 절도 혐의만으로 기소돼 그 해 3월 26일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경찰의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놓여 있다.
경찰은 적잖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용의자로 지목됐던 조 씨 등이 무혐의로 풀려난 이후 경찰은 당시 수사과정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한 형사는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나”라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 경찰관들은 당시 지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압수사 논란에 대해서만큼은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이 사건을 담당했던 전주 북부경찰서 관계자는 “4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경찰은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어떠한 가혹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수사에 참여했던 한 형사도 용의자 두 명이 자신들의 부모 앞에서 자백했던 당시 정황을 언급하며 강압수사 논란을 일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 씨 등 그때 그 용의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한 희생’을 당할 뻔한 것일 수 있다. 막대한 병력이 동원돼 물증을 찾았지만 범인이 탈취한 권총과 범행에 사용된 흉기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점, 당시 경찰이 조 씨 등이 오토바이를 찾으러 갔다가 시비가 붙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으나 잔혹한 살인에 총기 탈취까지 저지르기에는 범행 동기가 너무 미약하다는 점 등도 조 씨 등의 결백 가능성을 높여주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실제 조 씨 등은 무혐의 처분을 받고 이미 자유의 몸이 된 상태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그간의 경찰 수사 내용을 요약해보면 어렴풋이나마 범인에 대한 몇 가지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범인은 피살된 백 경사와 안면이 있을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당시 부검 결과 백 경사의 사체에는 별다른 저항흔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백 경사가 범인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다가 갑자기 피습을 당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상대와 안면이 있거나 상대가 노약자일 때 경계심을 풀게 마련이다. 범인 역시 백 경사에게는 비슷한 대상이었던 것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범인은 백 경사가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흉기를 숨기고 들어와 백 경사를 여섯 번이나 찌르고 권총을 탈취해 가면서도 현장에 지문이나 족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 또한 범행 뒤에는 파출소 뒷문을 통해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정황들로 보아 범인은 굉장히 용의주도한 자로 파출소 사정에 밝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범행 전 미리 현장을 답사했거나 범죄 전력이 있을 개연성도 크다.
끝으로 범인은 총기 탈취가 주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백 경사를 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범행 뒤 빠른 시간 안에 현장에서 벗어나려는 게 범죄자의 심리. 하지만 범인은 백 경사를 흉기로 찌른 뒤 누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파출소 안에서 시간이 지체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권총을 케이스에서 떼어내 가져갔다. 만약 범인의 타깃이 권총이었다면 이 권총이 그뒤에 다른 범행에 사용됐거나 사용될 개연성도 적지 않다. 따라서 사라진 권총에 대해 다각도로 지속적인 수사를 펴는 것이 사건의 단서를 찾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수사본부는 비록 해체됐지만 수사가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면서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 억울하게 죽은 백 경사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의지를 내비쳤다. 어쩌면 경찰과 베일 속 범인의 기나긴 추격전은 이제 또 다른 라운드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