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살인은 치정이나 금전으로 인한 원한관계로 인해 일어난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살인마들은 범행대상을 가리지 않고 아무 이유없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더욱 경악시키고 있다. 저항능력이 없는 유아나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엽기범죄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 2003년 어느 날 집 앞 놀이터에서 놀던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는 3주 뒤 다른 지역의 한 저수지에서 참혹한 변사체로 발견되고 만다. 당시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광명 여자초등생 살인사건은 이렇게 비극의 막을 열었다. 그뒤 3년 9개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건은 미해결 상태다. 아직 뚜렷한 용의자도, 단서도 없는 상황이지만 어린 생명을 앗아간 살인마에 대한 ‘응징’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지난 2003년 3월 30일 광명시 소하2동의 한 주택가. 오후 5시 무렵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전 아무개 양(당시 8세)은 놀이터에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잠깐 놀다가 들어오겠다며 놀이터로 간 전 양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날 집 앞 놀이터에 나타난 전 양은 평소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또래들 사이에서 놀던 전 양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 양이 혼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거나 아무 연락도 없이 늦는 경우는 여지껏 없었다. 전 양의 부모는 실종신고를 했고 경찰은 즉각 전 양을 찾아 나섰다. 동네 구석구석은 물론 옆 동네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소녀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또 놀이터에서 사라진 이후 전 양을 목격한 사람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놀이터는 평소 전 양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즐겨 놀던 곳이었다. 집에서 불과 50m 정도 떨어져 있어 인적이 드문 곳도 아니었다. 인근에 주택가가 밀집해 있을 뿐 아니라 동네 어른들이 수시로 지나다녀 아이들이 놀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였다. 사건 당일에도 놀이터엔 전 양 외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어느날 갑자기 집 앞 놀이터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아이. 도대체 누가 어디로 데려간 것일까.
우선 목격자를 찾는 것이 시급했다. 경찰은 당시 놀이터에 있던 아이들을 상대로 전 양의 행방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러던 중 몇몇 아이들에게서 ‘수상한 아저씨’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신원을 알 수 없는 20대 남성이 전 양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실종사건은 유괴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 남성을 유력한 용의자라고 보고 그의 행방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시켰다. 우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 아래 용의자의 범위를 점점 좁혀나갔다.
첫째, 금품을 노린 납치사건일 가능성이었다. 보통 전 양처럼 어린아이를 유괴하는 경우에는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부모에게 거액을 요구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경찰과 전 양의 부모는 유괴범으로부터 반드시 연락이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기다렸다. 전 양의 부모는 아이만 무사히 돌려보내준다면 범인이 제시하는 어떤 조건도 들어줄 참이었다. 하지만 전 양이 사라진 지 며칠이 지나도 금품을 요구하는 범인의 협박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여기서 성도착증을 가진 남성의 범행일지 모른다는 두 번째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간의 범죄 사례로 볼 때 대개의 여성 납치 사건은 돈과 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찰은 범인이 초등학교 1학년에 불과한 전 양을 범행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범인은 미성숙한 여아의 몸에 집착하는 ‘롤리타콤플렉스’를 지닌 남성일 가능성도 있었다. 조속히 범인을 검거하지 못할 경우 전 양은 끔찍한 성범죄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었다. 이에 경찰은 지역 내 정신질환자나 행려자, 성범죄 전과자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셋째는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었다. 경찰은 전 양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놀이터는 아이들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으로 강제로 납치하기는 사실상 어려운 장소였다. 낯선 사람이 강제로 자신을 데려가려 했다면 전 양은 반항했을 것이고, 이 경우 범인과 실랑이를 하는 전 양을 누군가 목격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전 양이 반항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놀이터에 있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전 양이 20대로 보이는 한 남성과 함께 어디론가 갔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전 양이 반항없이 순순히 범인을 따라갔다는 점에 주목, 평소 전 양을 알고 있는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동시에 전 양 가족에 대한 원한으로 인한 보복범죄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전 양 부모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지만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진 못했다.
마지막으로 경찰은 전 양과 무관한 자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일 가능성도 짚어봤다. 범인이 반드시 면식범이라는 법은 없었다. 예상 밖으로 범인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낯선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경찰은 전 양이 아직 판단력이 낮은 어린 아이라는 점을 감안, 낯선 사람이 베푸는 호의에 솔깃해 따라갔을 경우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전 양과 관련된 단서나 목격자를 찾기 위해 경찰은 전 양의 거주지와 학교는 물론 광명시 일대를 수색했다. 동시에 전 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시 일대에 거주하는 성범죄자나 전과자, 최근 출소자, 전·출입자 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도 없이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놀이터 아이들의 진술에 따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던 20대 남성의 신원 역시 좀처럼 파악되지 않았다.
그렇게 실종 4주째를 맞던 4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독지리 시화간척지 내 물웅덩이에서 한 여자아이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처음엔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사체와 전 양을 연관짓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육안으로는 분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가 심했기 때문이다. 단지 체형이나 골격 등으로 짐작컨대 7~8세 정도의 여자아이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사건 소식을 들은 광명경찰서 형사들은 사체가 전 양 또래의 어린 소녀라는 점에 주목, 즉각 현장으로 출동했다. 20여 일 전 집 앞 놀이터에서 사라진 전 양은 이때까지만 해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따라서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누군가 전 양을 다른 지역으로 끌고가 살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예의 사체를 본 순간 형사들은 전 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가장 큰 단서는 사체에 입혀져 있던 옷이었다. 사체는 공교롭게도 실종 당시 전 양이 입고 있던 분홍색 니트와 회색 운동복 바지 차림이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경찰은 사체가 전 양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정확한 신원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 및 유전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사체가 전 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부패가 워낙 심해 정확한 사인 및 성폭행 여부는 드러나지 않았다. 실종사건이 납치살해사건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체의 부패 정도로 볼 때 전 양은 실종된 지 이틀쯤 뒤에 살해돼 웅덩이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됐다. 또 사체의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어 전 양이 어디론가 끌려다니다가 살해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경찰을 놀라게 한 것은 발견 당시 사체의 상태였다. 사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사체의 머리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고 양손과 양발은 나일론 빨랫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단순 사고사가 아닌 타살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정상적인 사람의 소행이라 보기에는 범행 수법이 너무 엽기적이었다. 반항할 힘도 없는 어린 소녀를 무자비하게 결박한 후 살해한 것도 모자라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놓은 범인의 잔인함에 경찰은 치를 떨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전 양의 사체가 발견된 장소는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며 지역 주민들조차 거의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또 차량 진입은 가능하지만 초행자가 접근하기에는 까다로운 길이라는 점에서 경찰은 범인이 이 지역의 지리에 밝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전 양의 얼굴 부위를 비닐봉지로 가린 것으로 보아 면식범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경찰은 30명이 넘는 대규모 전담반을 편성해 전 양의 동네인 광명일대와 사체가 발견된 화성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수사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했다.
미궁에 빠져 있던 전 양 사건은 그후 거의 1년이 흐른 2004년 2월 16일 전남 목포에서 초등학생을 납치한 혐의로 김 아무개 씨(당시 40세)가 검거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는 듯했다. 당시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던 김씨는 전 양의 사체가 발견된 달인 2003년 4월 미성년자유인죄로 구속된 뒤 같은 해 12월에 출소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김 씨는 출소 뒤 2개월도 채 되지 않은 2004년 2월 8일 목포시 옥암동의 한 상가 앞에서 여자 초등학생을 납치한 혐의로 또다시 구속됐다.
경찰은 김 씨에게 어린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한 동일 전과가 있다는 점, 인상착의가 전 양 사건 용의자의 몽타주와 흡사하다는 점을 들어 김 씨의 여죄 가능성을 두고 수사했다. 하지만 김 씨는 전 양 사건과 무관함을 주장했고 조사 결과 뚜렷한 혐의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발생 4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전양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아직 구체적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간의 수사 내용을 토대로 보면 범인은 △20~30대 초중반의 남자로 △전 양과 안면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광명시내뿐만 아니라 화성시 일대의 지리에 밝고 △성적 콤플렉스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명경찰서 관계자는 “뚜렷한 범행동기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를 상대로 저지른 잔혹한 사건”이라며 “여전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추가 제보나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사건 역시 불명예스러운 미제사건 파일에 계속 남게 될 공산이 크다.
도대체 그날 전 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찰은 오늘도 묵은 수사기록들을 펼쳐보며 그날의 미스터리를 뒤쫓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