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치료를 받은 후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박 양은 응급실에 실려온 지 나흘 만인 12월 21일 밤 11시 20분경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인은 악성뇌부종. 도대체 박 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 당일 박 양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평소와 다름없이 밤 11시경 집을 나섰다.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기 위해서는 덕포동 덕포 체육공원 앞을 지나야 했다. 늦은 시간이라 인적은 없었지만 매번 지나다니던 길이라 박 양에게는 그다지 위험한 길로 여겨지지 않았다.
체육공원 옆 노상을 걷고 있을 때 박 양은 자신의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한 30대 남자를 발견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이 남자가 왠지 불안했지만 박 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 양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불행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다가오는 낯선 남자의 눈길에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박 양은 걸음을 재촉했다.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지나친 박 양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예의 남자가 미리 준비한 길이 50㎝, 무게 2.5㎏ 상당의 둔기로 뒤에서 박 양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었다.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자의 폭행은 머리와 얼굴 부위에 집중적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계속됐다. 엄청난 충격에 박 양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사건을 접수받은 경찰은 여성의 안면 부위를 집중적으로 가격한 범행수법으로 볼 때 범인이 상당히 잔인한 기질을 갖고 있으며 정신병력이 있는 인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현장 인근에서 잠복하던 경찰은 밤늦은 시간 덕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또 다른 범행대상을 찾고 있던 김 아무개 씨(33)의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경찰은 수상쩍은 행동을 하던 김 씨를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검거, 범행일체를 자백받고 12월 21일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 씨의 집을 수색한 경찰은 방안 벽지와 욕실 바닥, 구두 등에서 혈흔을 발견하고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혈흔의 DNA가 사망한 박 양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처음에는 단순강도의 범행으로 보였던 이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엄청난 사실이 발견되면서 경찰을 경악시켰다. 범행수법의 잔혹성 등으로 보아 인근 불량배나 금품을 목적으로 한 전문 강도의 소행일 거라는 애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김 씨는 대학원까지 마치고 중견기업에 근무 중인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김 씨의 범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김 씨는 이전에도 강간미수와 폭행 등으로 복역한 전과가 있는 문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김 씨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박 양에게 테러에 가까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김 씨의 대답에 형사들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옛날 애인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담담히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의 범행동기는 여성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증오의 뿌리는 6년 전 실연의 상처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의 첫 범행은 지난 2000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김 씨는 애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게 된다.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김 씨는 애인의 마음을 돌리려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애인의 갑작스런 변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김 씨의 생활은 엉망이 되고 만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지만 떠난 옛 애인은 김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김 씨는 이때부터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적개심을 품게 됐다. 옛 애인과 닮은 여성에겐 특히 더 했다. 그리고 헤어진 애인에 대한 김 씨의 삐뚤어진 적개심은 엉뚱하게도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젊은 여성들에게 표출됐다.
이별 직후 김 씨는 옛 애인과 닮은 20대 초반의 한 여성을 발견한 순간 가슴 속에 있던 복수심이 발동했다. 김 씨는 그녀를 성폭행하려다 실패, 붙잡힌 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 여성을 향한 ‘묻지마 테러’의 시작에 불과했다.
김 씨는 옛 애인과 비슷한 여성을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결국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다수의 여성들을 둔기와 돌 등을 이용해 무차별 폭행했다. 피해 여성들은 모두들 길거리를 오가며 마주친, 김 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당시 김 씨에게 당한 젊은 여성들은 무려 6명에 달했다. 얼굴 부위를 집중적으로 가격당한 이들 여성은 모두들 심각한 부상을 입고 수술 및 입원 치료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얼굴에 심한 손상을 입은 여성들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에 시달려야 했다.
집행유예 기간 중 반복된 범행으로 경찰에 꼬리가 잡힌 김 씨는 2001년 구속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후 4년을 복역하다 지난해 8월 만기를 6개월 앞두고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출소 뒤에도 김 씨의 여성에 대한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감생활 동안 여성에 대한 김 씨의 막연한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김 씨는 전과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그 원인을 다시 여성들의 탓으로 돌렸다.
특히 자신에게 엄청난 실연의 상처를 남긴 옛 애인에 대한 증오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하지만 김 씨는 옛 애인에게는 차마 보복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옛 애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여성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하겠다며 구체적인 범행계획을 세우게 된다.
김 씨는 이때부터 길을 오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살피며 옛 애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여성들을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특히 옛 애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생머리를 지닌 여성은 범행의 첫 번째 타깃이었다.
김 씨는 지난해 8월 26일 오전 1시 20분께 부산 사상구 덕포동 골목길에서 길을 가던 한 여성(26)을 쫓아가 안면을 마구 폭행하는가 하면 지난 12월 4일 자정께에도 덕포동 아파트 인근 노상을 지나가는 여성을 폭행하는 등 그간 묻지마 범행을 계속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의 범행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옛 애인과 닮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동안 김 씨의 범행 타깃이 된 여성들은 옛 애인과 비슷한 용모를 지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20대 안팎에 긴 생머리를 한 갸름한 얼굴의 여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옛 애인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여성만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결과 김 씨는 2001년 범행 직후 공주치료감호소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정밀한 정신감정을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감정결과는 ‘혼재성 인격장애’. 분열성 인격장애와 비사회적 인격장애가 겹친 위험한 정신장애의 일종으로, 연쇄살인마 정남규 역시 김 씨와 동일한 감정 판정을 받은 바 있다.
부산 사상경찰서 강력2팀의 김상춘 형사는 “여성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에서 시작된 김 씨의 범행은 다수의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김 형사는 “김 씨의 범행은 아무 상관도 없는 여성들을 상대로 특정한 목적도 없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했다. 조속히 검거하지 못했더라면 더 많은 피해자를 낳았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피의자 김 씨는 과거 실연에 대한 상처와 정신병력을 거론하며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 경찰 측의 전언이다. 하지만 김 형사는 “그 어떤 이유로든 사회 약자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행은 정당화되지 못하며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특히 여성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으로 피해 여성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죄질이 상당히 나쁘다고 본다”며 착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