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을 잇는 국도 47호선과 43호선에 인접한 군인 아파트를 집중적으로 털어왔는데 이들의 표적이 된 가구는 무려 140가구가 넘었다. “군인아파트의 경비망이 더없이 허술했다”며 군의 ‘보안망’을 어이없이 농락한 간 큰 도둑들의 범행행각 속으로 들어가보자.
지난 2001년 절도혐의로 지방의 한 교도소에 수감된 성 씨는 감방동기로 인연을 맺은 손위의 정 씨와 호형호제하는 특별한 친분을 맺게 된다. 출소 후에도 만남을 이어오던 이들은 마땅한 ‘일거리’를 물색하던 중 주인이 없는 빈 아파트를 털어 목돈을 마련해보기로 뜻을 모은다.
하지만 범행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서울과 수도권 일대의 여러 아파트를 돌아다녀봤지만 워낙 치밀한 보안시스템으로 인해 이들이 맘 놓고 금품을 털 만한 곳은 없었다. ‘만만한’ 범행 대상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어느 날,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군인아파트였다. 성 씨와 정 씨의 ‘군인아파트 전문 절도 2인조’ 행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필 군인아파트를 범행 대상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군인아파트는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어느 주거단지보다 방범망이 더 치밀할 것 같지만 이들이 직접 탐문해본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일단 군인아파트는 일반 민간인 주거단지와 멀리 떨어져있는 데다가 군부대와 인접한 외곽지역이나 산중턱에 위치해 타인에게 노출될 위험이 적었다. 또 지은 지 2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가 많고 5~6층 이하의 단층구조로 되어 있어 베란다나 가스 배관을 통해 침입하기에도 용이했다.
이들 2인조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점’은 아파트 각 동마다 CCTV는커녕 경비초소도 없어 외부인의 출입이 전혀 제한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아파트 뒤편에는 인적마저 드물어 외부인이 어슬렁거려도 누구 하나 신경 써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 설령 도둑이 들어도 용의자를 추적할 수 있는 마땅한 시스템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군인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로서는 스스로 문단속을 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범 활동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성 씨 등이 확인한 결과 창문 방충망조차 갖추지 않은 집이 셀 수 없이 많았고 심지어 출입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는 집도 부지기수였다. 군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주민들이 문단속과 방범에는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 SBS 8시 뉴스 화면 캡처. | ||
이들 2인조는 즉시 범행 계획을 짜고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형님’격인 정 씨가 망을 보는 사이 성 씨가 아파트 뒤편의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창문을 깨고 집안에 침입하는 대담한 수법을 사용했다. 절도 전과가 있었던 이들에게 낮은 저층 아파트 가스배관을 타고 집 안으로 침입하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특히 군인들이 주말에 자주 가족들과 외출하고 집을 비운다는 사실을 간파한 이들은 주말이나 휴일 저녁 시간대를 골라 집중적으로 범행을 저질러왔다. 불 꺼진 집들은 예외없이 이들의 범행대상이었다. 또 주민들의 눈에 띄었을 경우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파트를 순찰하는 사복 보안요원인 체하며 대담하게 범행을 계속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방법으로 지난해 1월부터 1년여 간 이들 일당이 군인아파트를 턴 건수는 무려 141건. 이들이 훔친 금품만 해도 4억 원대에 달했다.
이들이 훔친 물품 중에는 현금 외에도 유독 금반지와 다이아반지, 진주목걸이 등 값비싼 귀금속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는데 다이아몬드만 해도 50개가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귀금속들은 대부분 군인들이 결혼할 때 장만한 소중한 결혼패물이었다. 성 씨 등은 진짜 다이아몬드를 감식할 수 있는 감별기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치밀하게 범행을 저질러왔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다른 지역보다 경비가 허술하면서도 다가구들이 밀집되어 있는 경기 포천시와 강원 철원군 등지의 군인아파트를 주요 타깃으로 삼았고 또 같은 아파트를 여러 번 털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장교와 부사관의 주거지였던 한 아파트에는 무려 다섯 차례나 연속 침입해 절도행각을 벌여 경찰을 놀라게 했다. “이들 2인조가 ‘누가 감히 군인 아파트를 털겠나’ 하는 주민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마치 제 집 드나들듯 대범한 절도행각을 벌여왔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체포 당시 성 씨에게서 압수한 ‘메모지’. 달력 이면지에 작성된 이 메모에는 전국에 분포해 있는 23개 사단급 부대의 명칭과 주소는 물론이고 48개 부대의 군인아파트 단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이 자필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리스트는 실제 군부대 현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져 경찰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일부 아파트에는 별표 표시가 되어 있어 수사팀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조사결과 별표 표시가 되어 있는 아파트는 그동안 도난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와 대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 경찰은 성 씨 등이 이 메모지에 적힌 정보들을 이용해서 범행을 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국가 보안사항에 해당되는 이 리스트를 대체 어떻게 입수한 것일까.
성 씨 등은 “범행 일주일 전 수도권의 화상 경마장에서 우연히 만난 남성에게 ‘목록’을 건네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이 직접 수차례 현지답사를 통해 치밀하게 리스트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리스트 입수 경위에 대해 추가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경기·강원도의 군부대 주변을 무대로 절도행각을 벌여오던 이들 2인조는 군인아파트에 부쩍 도둑이 자주 든다는 제보를 접하고 철원의 한 군인아파트에서 잠복근무를 하던 군 헌병대와 경찰에 꼬리를 잡히게 됐다. 공교롭게도 이 아파트는 그간 이들이 강원도 내에서 유일하게 건드리지 않은 군인아파트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