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눈이 멀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면수심 사건들이 연초부터 잇따라 일어나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1월 3일 자신에게 잠자리와 음식 등을 제공한 장애인을 살해하고 돈을 훔쳐 달아난 40대 노숙자가 경찰에 붙잡힌 데 이어 최근엔 갈 곳 없는 자신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준 일흔 노인과 그의 노모까지 살해하려 한 파렴치한 가출 10대 소녀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부천 남부경찰서는 지난 1월 22일 강도살인미수혐의로 김 아무개 양(16)과 홍 아무개 양(16) 등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형사미성년자(14세 미만)인 박 아무개 양(12)을 보호조처했다. 살인으로 번질 뻔했던 이 끔직한 사건은 집주인만 제거하면 집주인의 집과 돈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10대 소녀들의 무모한 발상에서 비롯됐다.
2년 전 가출한 김 양은 하루하루를 부천 시내의 찜질방과 PC방 등을 전전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학교도 싫고 집도 싫었던 김 양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또래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가출생활로 인해 심신이 지쳐 있었지만 어른들의 간섭을 견디지 못한 김 양은 다른 가출소녀들과 함께 그날그날 숙식을 해결하며 사는 하루살이 같은 생활을 계속해왔다. 그러던 중 김 양은 역시 채팅으로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소사구 심곡동에 있는 남자친구 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이러한 김 양의 모습이 이웃에 사는 노인 김 아무개 씨(70)의 눈에 목격된 것은 지난해 여름 무렵.
어린 소녀가 학교도 가지 않고 집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 없었지만 처음엔 김 씨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김 양이 나타날 때마다 유심히 지켜보던 김 씨는 급기야 김 양을 붙들고 자초지종을 묻게 된다. 김 양은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김 씨를 피했지만 여느 어른들과 다른 일흔 노인의 따뜻한 관심에 차츰 마음을 여는 듯했다.
볼 때마다 인사도 잘하고 싹싹하게 구는 김 양의 사정을 알게 된 김 씨는 측은한 생각에 김 양을 볼 때마다 ‘들어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며 호의를 베풀었다. 이것이 악연의 시작이었다. 김 씨는 머물 곳이 없어 방황하는 김 양에게 식사뿐 아니라 기꺼이 잠자리까지 제공했다. 이후로 김 양은 수시로 김 씨의 집을 드나들며 숙식을 해결해왔다.
그러던 지난해 8월 김 양은 김 씨에게 오랜 가출생활로 인한 어려움을 본격적으로 토로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떠돌이 생활에 지쳤다는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약해진 김 씨는 아예 자신의 방 한 칸을 내어주기에 이른다. 김 씨는 치매에 걸린 100세 노모를 모시며 반지하방에서 빠듯하게 생활하는 처지였지만 애처로운 마음이 더 컸다. 또한 김 양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가 잘 설득시켜 돌려보내려는 생각도 있었다.
노인 둘이 쓸쓸하게 살다가 새 식구가 들어오자 처음에는 집안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내 김 씨의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며칠 후부터 김 양은 홍 양과 박 양을 집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가출생활 도중 알게 된 사이로 김 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그저 잠깐 놀다가겠거니 했던 김 씨의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김 양은 김 씨의 동의를 받지도 않은 채 이들을 불러 아예 숙식을 해결하게 하는 등 마치 제집처럼 행동하기에 이른다. 김 양 일행은 김 씨의 집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갈수록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돌아갔다. 거리의 10대 소녀 3명이 들이닥친 집 안은 이내 난장처럼 변해갔다. 김 씨가 아무리 주의를 줘도 김 양은 아예 무시하거나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힘없는 노인의 말을 김 양 등이 제대로 들을 리 만무했다. 치매에 걸린 고령의 노모를 모시고 사는 김 씨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노릇이었다. 특히 노모에게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은 김 양과 그 친구들의 난동으로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급기야 누가 주인이고 객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에 처했다.
이 무렵 김 양 등은 자신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김 씨를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김 씨가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고마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김 양 등은 김 씨가 노모에 대한 경로수당으로 매달 정부로부터 10만 원의 보조금을 받는데다가 김 씨의 자식들이 월 100만 원 상당의 용돈을 입금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 씨에게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은 자신들이 마음껏 놀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게다가 김 양 등은 김 씨의 집을 자신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최상의 아지트로 여기고 있었다.
김 양 등은 김 씨와 그의 노모만 없으면 자신들이 그 집에서 편히 살 수 있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내 무서운 범행계획으로 이어졌다.
김 양 등은 김 씨와 노모를 살해하고 집과 고정수입을 가로채 아예 이곳에서 눌러 살기로 의견을 모은다. 이들은 범행을 위해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한 명이 건너방에 있는 노모를 붙들고 있으면 한 명은 김 씨에게 이불을 씌우고 나머지 한 명이 흉기로 찌른다는 식이었다. 김 양 등은 힘없는 일흔 노인과 거동이 불편한 100세 노모를 살해하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드디어 범행 디-데이로 정한 지난 1월 19일 김 양 등은 김 씨 모자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김 씨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새벽 2시 30분경 김 양 등은 미리 계획한 대로 김 씨가 자고 있는 방안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리고 김 씨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불을 덮어씌운 뒤 준비한 흉기로 김 씨의 배를 두 번 찔렀다.
하지만 한 번에 숨을 거둘 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 씨는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항했다. 예상치 못한 김 씨의 반응에 당황한 김 양 등은 그대로 달아났다. 간 부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김 씨는 가까스로 119 구급대에 신고해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 씨는 자신을 찌르고 달아난 범인이 김 양 일행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자칫하면 이 사건은 금품을 노린 강도에 의한 범행으로 묻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엉뚱한 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 경찰은 사건 당일 김 양 일행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이 아무개 양(17)을 조사하게 됐다. 그런데 이 양으로부터 “김 양 등이 강도살인을 모의했다”는 뜻밖의 말을 전해들었다. 부천 시내를 뒤지던 경찰은 사건 하루 만에 원미구의 한 PC방에 숨어 있던 김 양 등을 검거해 범행 일체를 자백받을 수 있었다.
경찰조사에서 김 양 등은 “할아버지를 죽인 뒤 집과 돈을 뺏으려 했다”고 태연히 진술, 경찰을 경악케 했다. 당장의 생활비와 유흥비 마련이 급했다는 것이었다. “돈에 눈이 멀어 은인을 살해하려 한 이번 사건을 철없는 10대들의 우발범행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범행 일주일전부터 베개에 이불을 씌우고 흉기로 찌르는 모의범행연습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이들은 치매를 앓고 있는 김 씨의 노모까지 살해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김 씨 모자를 차례로 살해한 뒤 사체를 커다란 가방에 넣어 인근 공원에 버리기로 하는 등 구체적인 사체유기 계획까지 세운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체포된 뒤에도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김 씨에 대한 고마움이나 죄책감조차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경찰관계자는 “아무리 겁없고 무서운 세대라지만 자신들의 범행이 얼마나 패륜적인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이들의 태도에 형사들이 더욱 충격을 받았다”며 “조건 없이 사랑과 호의를 베풀어서도 안 되는 삭막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고 한탄했다.
어린 소녀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시작된 5개월간의 ‘위험한 동거’는 결국 살인미수라는 끔찍한 결과만을 남긴 채 막을 내리게 됐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