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스쳐간 남자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하는 스토리의 영화 <텔미썸딩>의 스틸 사진. | ||
이번에 강남경찰서 강력1팀 김덕봉 팀장이 꺼내놓은 사건 역시 한 여성의 연쇄 살인극이다.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마약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 등 3명을 살해하고 부모와 형제, 지인까지 실명시켰던 엄 아무개 씨(여·31)에 대한 이야기다.
김 팀장은 “마약과 사치에 눈이 멀었던 한 여성의 범죄행각을 통해 약물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우리 사회의 황금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렸으면 한다”고 ‘악녀의 추억’을 어렵사리 다시 들춘 이유를 밝혔다.
과연 무엇이 그녀를 범죄의 나락으로 이끌었던 걸까. 시침을 몇 해 전으로 되돌려보자.
불과 7년여 전만 해도 엄 씨는 사치스럽긴 했지만 범죄와는 거리가 먼 여성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첫 남편 이 아무개 씨(당시 24세)를 만나 가정을 이뤘고 딸까지 낳았다. 하지만 2000년 초 첫딸을 사고로 잃으면서 엄 씨의 생활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분에 맞지 않는 명품을 구입하는 등 사치벽은 더 심해졌고 따로 파출부를 집 안에 불러놓고 외출하는 일도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대문 도깨비시장 인근에서 한 사내로부터 ‘기분 좋아지는 약’을 호기심에 구입하면서 엄 씨의 인생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 사내는 부유해 보이는 엄 씨의 겉모습을 보고 접근한 마약 판매상이었다. 마약의 중독성이란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는 몇 주 안 돼 마약의 마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문제는 돈이었다. 평소 낭비벽이 있던 데다가 별다른 직업도 없던 엄 씨에게 마약을 계속 구입할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김 팀장은 “초짜에게는 거저 주다시피하다가 무한대로 가격을 올리는 것이 ‘약쟁이’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이미 약에 빠진 사람들은 거금을 손에 쥐고서도 약을 구하지 못해 난리를 치게 마련이다. 복용자가 스스로 약을 찾게 되는 순간부터 마약은 부르는 게 값이 된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필로폰과 러미널에 중독된 엄 씨는 결국 마약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끔찍한 범죄를 꾸미게 된다. 사고를 위장해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는 것이 그녀가 세운 범행계획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 팀장의 설명.
“보험설계사로 일한 적이 있던 엄 씨는 보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가령 어떤 상해를 입었을 때 가장 쉽게 많은 보험금을 타낼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지식은 후에 그녀의 범행에 고스란히 적용됐다.”
엄 씨가 점찍은 첫 번째 희생자는 놀랍게도 남편 이 씨였다. 범행은 2000년 4월 사고를 가장해 이 씨의 머리에 충격을 줘 뇌진탕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 달여 뒤인 5월께 엄 씨는 남편 이 씨에게 약효가 강한 진정제를 먹인 뒤 핀으로 눈을 찔러 실명케 만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실명이 질병 탓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부인의 소행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 앞으로 닥칠 엄청난 ‘테러’에 대해서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엄 씨의 ‘남편 죽이기’는 이듬해 들어 더 노골적으로 진행됐다. 2001년 6월 엄 씨는 실명한 남편 이 씨에게 강력한 진정제를 몰래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얼굴에 끓는 기름을 부어 심한 화상을 입혔다. 또 3개월 후 엄 씨는 남편에게 다시 약을 먹인 뒤 주방용 칼로 배를 찌르는가 하면 2002년 1월과 2월에도 연거푸 같은 방법으로 상해를 입혔다. 결국 다발성장천공 및 장간막파열 등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남편 이 씨는 합병증으로 그해 3월 사망하고 말았다. 엄 씨는 자신의 범행을 남편의 자해 등으로 위장, 보험금 2억 8000여만 원을 챙겼다.
남편 이 씨가 사망한 그해 엄 씨는 또다시 보험금을 타내려는 목적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회사원 임 아무개 씨(당시 31세)에게 계획적으로 접근, 혼인신고를 하고 동거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김 팀장의 얘기.
“첫 번째 남편에게 썼던 범행수법을 임 씨에게도 그대로 사용했다. 2002년 11월 임 씨에게 수면제를 넣은 과일주스를 먹인 뒤 핀으로 눈을 찔러 실명케 하고 두 달 후에는 화상을 입히고…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서운 일을 벌이고 보험금 3900만 원을 편취했다. 연이어 끔찍한 상해를 입고 치료를 받던 임 씨 역시 심한 합병증으로 엄 씨와 동거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두 명의 남편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 처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당시 모든 것은 불의의 사고와 자해 등으로 위장됐다.”
그러나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두 남편’을 사실상 살해하고 3억 원이 넘는 보험금을 손에 쥐었지만 마약에 빠져 있던 엄 씨의 범행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급기야 엄 씨의 범행 타깃은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에게로 향했다. 2003년 7월 엄 씨는 어머니에게 수면제를 섞은 주스를 마시게 한 뒤 눈을 찔러 실명케 만들었다. 또한 얼마 후에는 오빠에게도 수면제를 넣은 술을 마시게 한 뒤 눈에 염산을 넣어 실명케 했다. 그뒤 엄 씨는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병실에 있던 오빠의 링거호스에 자신의 아들이 복용하던 기관지 확장제를 투여, 살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엄 씨의 범행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엄 씨는 오빠 등 가족들이 거주하던 아파트를 임의로 팔아 돈을 챙기고 가족들에게는 다른 곳에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다 이사날짜가 다가오자 거짓말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더 흉측한 범행을 저질렀다. 2005년 1월 9일 새벽 엄 씨는 실명한 오빠에게 수면제를 혼합한 석류주스를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아파트에 불을 질러 오빠와 남동생에게 중화상을 입혔다. 물론 이번에도 화재사고로 위장했다.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를 실명케 하고 화상을 입힌 뒤 엄 씨가 챙긴 보험금은 2억 7000만 원에 달했다.
화재로 거주할 곳이 없게 되자 엄 씨는 자신의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던 강 아무개 씨에게 “대가를 지불할 테니 당분간 당신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강 씨의 집에서 나가기로 약속한 시기가 되자 그동안 밀린 방세가 걱정된 엄 씨는 강 씨의 식구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뒤 거실에 불을 질렀다. 엄 씨의 방화로 강 씨의 남편이 화상으로 사망하고 강 씨와 강 씨의 자녀 역시 심각한 상해를 입고 말았다.
엄 씨의 주변 인물들에게 괴이한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엄 씨의 소행이라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모의 28세짜리 주부가 마약에 빠져 이 같은 엽기행각을 벌여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남편과 가족, 지인들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던 엄 씨는 이 무렵 또 다른 범행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2005년 3월께 한 병원에 입원한 자신의 아들을 간호하던 엄 씨는 교통사고를 당한 애인 때문에 같은 병실을 자주 방문하던 전 아무개 씨(여·24)를 눈여겨보고 범행대상으로 점찍는다. 엄 씨는 그녀의 금품을 절취할 목적으로 전 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엄 씨는 전 씨의 가방에서 전 씨 애인 명의의 카드를 훔쳐 아들의 입원비 900여만 원을 계산하고 현금 500만 원을 인출하는 등 모두 1800만 원을 절취했다. 그리고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까 두려웠던 엄 씨는 전 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는다. 김 팀장이 전하는 당시 상황.
“2005년 4월 3일 엄 씨는 전 씨에게 수면제를 다이어트 약이라고 속여 먹인 뒤 눈을 찔러 실명케 했다. 더 무서운 건 눈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전 씨를 찾아가 입을 막으려 했다는 점이다. 전 씨가 잠든 사이 세 차례에 걸쳐 링거주사액에 이물질을 넣었는데 전 씨 역시 엄 씨의 오빠와 마찬가지로 몇날며칠을 오한에 시달리고 심장발작 증세를 일으켰다. 정말 목숨을 건진 게 기적이었다.”
엄 씨의 범죄행각으로 상해를 당한 사람은 그녀의 가족을 포함해 모두 9명. 그중 3명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사망했으며 무려 5명이 졸지에 시력을 잃었다. 엄 씨가 보험금 등으로 챙긴 돈만 해도 총 6억 5000여 만 원. 이 돈의 대부분은 마약을 사거나 명품 옷 등을 구입하는 데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진 엄 씨의 범행수법은 수면제가 함유된 강력한 진정제를 주스나 술에 타서 마시게 한 뒤 항거불능 상태가 되면 주사기바늘, 핀 등을 이용해 눈에 상해를 입히거나 염산을 눈에 넣어 실명케 만드는 식이었다. 또 엄 씨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이 상해를 입혀 치료를 받고 있던 사람을 찾아가 살해를 시도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무려 5년 가까이 이어진 엄 씨의 엽기 행각은 경찰의 치밀한 수사로 인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된다. 한 화상 전문병원의 비상계단에 석유가 뿌려져 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이 누군가 병원 방화를 목적으로 저지른 행동이라고 판단, 병원 방문자들을 면밀히 수사한 끝에 범행의 꼬리를 잡게 된 것. 경찰은 용의선상에 오른 엄 씨 주위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해 엄 씨 주변에는 항상 괴이한 사건들이 있었다는 진술을 먼저 확보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인 끝에 엄 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을 수 있었다. 이때가 2005년 4월 28일. 그동안 묻혀 있던 잔혹하고도 엽기적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엄 씨는 살인과 살인미수, 방화치상 등의 혐의로 기소됐고 2005년 10월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는 엄 씨에게 살인과 살인미수 등의 혐의를 적용,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건강한 두 남편이 단기간에 사망했고 가족들과 젊은 여성이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끔찍한 결과가 발생했지만 엄 씨는 범행 후 챙긴 돈으로 피부관리를 받거나 명품 옷을 구입하고도 ‘기억이 없다’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도 “자녀의 사망 등 순탄치 못한 가정생활을 보낸 뒤 범행에 이른 점 등을 참작해 극형만은 면하도록 한다”고 밝혔다.
엄 씨는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아왔을지언정 엄마와 오빠한테까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라며 범행사실을 부인, 항소했지만 서울고법 형사5부는 지난해 8월 6일 엄 씨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은 구치소 담 너머로 전해지는 엄 씨의 모습. 옥중의 엄 씨는 죄과를 참회하기는커녕 아직까지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엄 씨 사건은 대법원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