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들에 의해 붙잡힌 날치기범 주 아무개 씨. 아래는 그의 집에서 발견된 금으로 만든 휴대폰줄들. | ||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2월 21일 주 아무개 씨(38)를 특가법상 상습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 조사 결과 주 씨는 2004년 초부터 3년여 동안 50여 차례에 걸쳐 강남, 분당 등의 부유층 중년 여성을 상대로 억대의 금품을 날치기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주 씨가 날치기에 사용했던 배달 오토바이도 경기도 부천시의 한 음식점에서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이 주 씨의 집을 압수수색한 결과 천장 안쪽에서 1500만 원권 수표 2매, 1000만 원권 수표 2매 등 수표만 2억 원(326장)어치가 나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밖에도 집안 곳곳에서 샤넬, 구찌, 페라가모, 버버리, 닥스 등 명품 백과 MP3, 카메라 등 전자제품, 위조된 신분증이 발견됐다. 또한 주 씨가 보관해오던 금품들 중엔 피해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동일한 모양의 순금 돼지 휴대폰 고리가 11점이나 있어 눈길을 끌었다.
주 씨는 그동안 동거녀 등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을 증권 투자로 돈을 버는 사람으로 소개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주 씨는 절도로 생활비를 버는 범죄자였고 그가 타고 다니던 엔터프라이즈 또한 200만 원짜리 중고차였다. 한 전문 날치기범의 기막힌 이중생활 속으로 들어가보자.
평상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가진 인텔리인 양 행세해왔던 주 씨. 하지만 10대 시절 절도사건으로 소년보호원에 들어가는 등 주 씨의 과거는 결코 평탄치 않았다. 특수절도 전과 3범인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린 게 지난 2003년 2월. 당시 출소하면서 주 씨는 새사람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당장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결국 그는 ‘전공’을 발휘해 돈을 마련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주 씨는 일단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중고 오토바이를 한 대 샀다. 오토바이를 이용한 날치기 범죄를 계획했던 것. 원래 ‘주거 침입형 절도’가 전문이던 그였지만 사람이 있는 집에 들어갔다 봉변을 당한 적이 있던 터라 전공을 바꾸게 됐던 것이다. 과거 주 씨는 빈집만 찾아다니며 금품을 털어왔는데 어느 날 하필 주인이 있는 집에 들어갔다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겨우 도망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빈집을 찾아내는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느낀 그는 부녀자를 상대로 한 날치기가 가장 편하다고 판단하게 됐던 것.
기왕이면 돈이 있는 강남 거주 중년 여성들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강남 지역의 적당한 주택가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돈이 궁해질 때마다 자신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그 곳으로 ‘출근’했다. 중후한 자가 운전자에서 헬멧을 쓴 날렵한 오토바이맨으로 모습을 바꾼 주 씨는 강남 일대를 돌아다니다 명품 가방을 들고 가는 여성이 보이면 순식간에 옆을 지나치며 가방을 낚아챘다. 가방 안에 전자제품이나 돈이 된다 싶은 물건이 있으면 일단 챙기고 가방은 아무 곳에나 버렸다. 그리고 다음 범행을 위해 적당한 곳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자신의 엔터프라이즈 승용차로 갈아탄 뒤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 날치기범 주 씨가 몰고다니던 중형차와 범행에 사용된 오토바이. 이 오토바이 역시 훔친 것이다. | ||
주 씨는 비록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소년범이 되긴 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치고 유명 복장학원을 다니며 제복 기술을 배웠던 것. 그 뒤 주 씨는 의류 디자인에서부터 패턴, 재단 등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거뜬히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술자가 되었고 소규모 의류 브랜드에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까지 맡았다. 그러다 그는 직접 디자인까지 한 의류 브랜드를 만들어 자기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남대문시장에 작으나마 매장도 만들고 도매업도 겸했다.
사업은 계속 발전해나갔고 주 씨는 돈도 꽤 벌었다. 집도 사고 결혼도 해 자식까지 얻는 등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의류 사업은 몸이 축나는 힘든 일이었고 과다한 업무에 지친 주 씨는 궁리 끝에 유통업으로 사업 분야를 바꾸게 된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유통업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억대의 빚을 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간 투자해온 주식도 큰 손해만 보게 되었고 주 씨는 결국 이혼까지 당하는 신세가 됐다.
집안의 막내였던 주 씨는 가족들로부터 조금씩 도움을 받으며 한동안 재기의 꿈을 키웠다. 빚을 갚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낮에는 지하철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밤엔 대리운전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 돈으론 이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 주 씨는 망설이던 끝에 결국 남의 집 담을 넘고 말았다. 그리고 한 번 훔친 돈 맛을 본 뒤부터는 빚 독촉을 받거나 돈이 궁해질 때마다 방범이 허술한 빈집을 골라 드나들었다. 이렇게 전문 절도범으로 전락한 주 씨는 결국 두 차례나 더 교도소를 드나드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주 씨가 2003년 출소 이후 날치기범으로 변신한 데에는 그의 과거 경력도 한몫했다고 한다. 의류업을 하면서 고급 여성복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웠던 터라 돈이 있는 부유층 여성을 비교적 쉽게 고를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날치기를 해도 주 씨의 ‘살림’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경찰이 주 씨의 집을 압수수색했을 때 수표만 2억여 원어치가 나왔던 데서 알 수 있듯 부유층 중년 여성들은 현금보다는 주로 수표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 씨는 추적당할 것을 우려해 수표는 사용하지 않았다. 때로 한 번에 현금만 1400만 원가량 든 백을 날치기하기도 했지만 열에 아홉은 몇 만 원에서 많아야 몇 십만 원의 현금을 손에 쥘 뿐이었다. 게다가 이혼한 전처에게 겨우겨우 아이들 양육비를 대주고 있던 처지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 여성을 만나 동거까지 하게 된 주 씨로서는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훔친 오토바이로 계속해 날치기를 했지만 목돈을 만지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주 씨는 날치기한 고액권 수표를 사용할 수 없을까 고민하며 힘들게 신분증까지 위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신고가 된 수표일 것이라는 생각에 실제 은행까지 가지는 못했다. 주 씨는 훔친 수표 등은 동거녀 모르게 천장 속에 감추고 순금돼지 휴대폰 고리, 금팔찌 등 보석류는 서랍 아랫부분 틈에 숨겼다. 다른 전자제품이나 금품은 처분할 줄을 모르거나 ‘구차스러워’ 그냥 집에 보관했다고 한다.
절도 전과 3범의 ‘프로’라고 하기엔 이처럼 다소 애매한 면이 있었던 주 씨. 그러나 경찰의 말에 따르면 주 씨는 진짜 ‘선수’였다. 경찰 조사에서 주 씨는 길에서 아무나 돈이 있어 보이는 여성들의 백을 날치기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회사 공금, 곗돈, 고스톱 판돈 등 뭉칫돈을 가진 여성들만 용케 골라낼 정도로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였다.
주 씨는 시계 등 금품은 범행 후 그냥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피해여성들은 날치기당한 가방 안에 890만 원짜리 롤렉스 시계가 있었다거나 800만 원짜리 다이아반지가 들어 있었다며 주 씨가 처분한 게 분명하다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주 씨는 현금만 어느 정도 들어왔어도 그 돈을 밑천 삼아 자그마한 가게라도 하려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주 씨는 훔친 돈으로 떡볶이 스넥카를 사서 몇 달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떡볶이를 팔아서 손에 들어오는 현금은 날치기를 할 때에 비해 형편없었고 결국 그는 스넥카를 팔아버린 후 또다시 날치기 전문으로 나서고 말았다.
주 씨는 과거에 좀 편하게 돈을 벌고 싶어 의류업에서 유통업으로 사업 분야를 바꾼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오고 말았다. 경찰 관계자는 “주 씨가 ‘생계형 절도’였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피해자 중에는 회사 공금을 잃어버리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 사람도 있다”면서 “아무리 어렵게 살았다고 해서 수십 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남의 돈에 손을 댄 것까지 동정해줄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경찰은 지난 2월 22일 수표 분실 신고를 한 피해자들을 상대로 주 씨의 추가 범행을 캐는 한편 주 씨를 잡은 대리운전 기사 곽 아무개 씨(41) 등 2명에게 용감한 시민상과 함께 포상금 50만 원씩을 전달했다.
장유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