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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항 CCTV에 찍힌 납치 장면. YTN 화면 캡처 | ||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2월 26일 오후 7시 43분경. 일본에서 귀국한 H 사 사장 강 아무개 씨는 아들(24), 운전기사 은 아무개 씨(40)와 함께 인천공항 1층 3번 게이트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흰색 카니발 승합차를 탄 세 명에 의해 납치됐다. 이들은 강 씨 일행을 강원도 평창군 봉평의 한 펜션으로 데리고 가 그곳 2층에 수갑을 채운 채 감금시켰다.
하지만 강 씨 일행은 이틀 뒤인 28일 오후 6시경 납치범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2층 창문을 통해 탈출, 경찰에 신고했고 범인들은 달아났다. 강 씨는 경찰에서 자신의 납치 과정과 의심되는 배후에 대해 진술했다. 그의 처음 진술에 따르면 피랍 하루 뒤인 27일 자신의 큰외삼촌인 A 씨(70)와 범인의 휴대폰으로 통화했다는 것. 당초 강 씨는 A 씨와 함께 작은외삼촌인 B 씨(66) 등 자신의 외삼촌 형제를 납치 배후로 강하게 의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수사 중인 인천공항경찰대는 이날 곧바로 A 씨를 불러 조사했으나 A 씨는 자신의 연루 사실을 강력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강 씨는 왜 자신의 납치 배후로 외삼촌들을 의심했던 걸까. 취재 결과 H 사의 경영권을 둘러싼 친인척 간의 소송과 암투는 오래 전부터 매우 치열하게 전개돼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이번 납치 파문은 지난 2000년 이후 H 사를 둘러싼 강 씨 집안의 오랜 경영권 분쟁으로 어느 정도 예고됐던 사태라는 게 회사 주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H 사는 경기도 용인의 H 골프장을 경영하는 기업으로 강 씨의 부친에 의해 지난 80년대 초 설립됐다. 부친 강 씨는 재벌그룹 롯데를 연상시킬 정도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큰 사업을 하는 기업가로 알려졌다. 3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은 사망했고 현재 실질적 장자 격인, 이번에 납치된 차남 강 씨와 3남 강 아무개 씨(54)를 슬하에 두고 있다. 부친 강 씨는 사업체 또한 일본 쪽은 강 씨에게, 한국 쪽은 동생 강 씨에게 각각 맡겼던 것으로 전해졌다. 강 씨 형제는 현재 모두 일본 국적의 재일교포 신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기업체인 H 사 역시 부친 강 씨가 경영을 맡아오다가 지난 2000년 말 대규모 노사분규 사태를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부자간에 경영권 교체가 이뤄졌다는 것.
당시 부친 강 씨는 3남을 새 대표로 취임시키며 분위기 쇄신을 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노조의 한 관계자는 “비록 전임 사장의 아들이긴 했지만 새 대표가 상당히 젊고 합리적인 경영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분위기로 일해보자며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때 동생 강 씨와 함께 경영진에 등장한 이가 바로 이번 납치 사건에서 배후로 의심받는 둘째외삼촌 B 씨였다. 당시 B 씨는 전무를 맡으며 둘째조카 강 씨와 함께 회사를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동생 강 씨와 B 씨의 경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은 6개월 만인 2001년 12월 강 씨 측의 소송 제기에 의해 대표이사직과 이사직의 직무집행을 각각 정지당했고 배임 혐의로 구속까지 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회사 주변에서는 ‘강 씨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부친 강 씨가 병환이 깊어지면서 두 아들이 한국과 일본 양국 사업체의 전체 경영권을 놓고 격돌하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강 씨 형제의 외삼촌 형제까지 가세해서 친인척간 경영권 다툼을 둘러싼 소송이 본격화된 것이다. B 씨 형제 측이 “강 씨가 부친의 뜻과는 달리 동생 강 씨를 밀어내고 한국 사업체까지 욕심을 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서면서 강 씨와 나머지 친인척 간의 대립이 본격화됐다는 설명이다.
삼촌 조카 사이인 강 씨와 B 씨의 ‘구원’은 이때부터 촉발됐다. 강 씨는 ‘B 씨가 법인명의를 도용해 50억 원에 이르는 돈을 대출받았다’며 민·형사 고소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B 씨는 이로 인해 수감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 출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1월 법적 효력정지를 당한 동생 강 씨와 외삼촌 B 씨를 대신해서 강 씨가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후 H 사의 대표는 현재까지 강 씨가 계속 맡아오고 있다. 하지만 강 씨 또한 경영권 다툼의 와중에 2002년 10월 횡령 혐의로 한 차례 처벌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강 씨의 B 씨에 대한 민사 소송은 현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맞서 B 씨 형제 또한 조카인 강 씨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회사 주변에서는 이런 소송전을 전 대표였던 동생 강 씨와 현 대표 강 씨 간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의 대리전 양상으로 보는 견해도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복잡한 배경 탓에 강 씨는 납치 직후 그 배후로 외삼촌 형제를 지목했던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강 씨의 큰외삼촌인 A 씨는 “그래도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데 어떻게 조카를 납치하겠는가”라며 통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고, 강 씨 또한 “당시 통화했던 이가 큰외삼촌인 것 같기는 한데 확실치는 않다”며 처음과는 달리 한 발 물러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경찰은 달아난 납치범을 검거하는 것이 납치 배후의 흑막을 풀 수 있는 첩경이라고 보고 있다.
납치에 사용된 승합차를 렌터한 당사자 한 아무개 씨(52)가 대전 지역의 조폭 S파 두목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조폭 개입이 단순한 청부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H 사의 전 노조 관계자들은 “불이익을 당할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한사코 취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관계자는 회사 주변에 폭력 세력이 얼쩡거렸던 적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납치 당시 범인들이 국정원을 사칭하며 “간첩혐의로 체포한다”고 한 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강 씨는 이 때문에 해명을 위해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승합차에 올라탔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항 CCTV에도 강 씨 등이 저항하는 장면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강 씨가 일본 국적 소지자로 일본 출입이 잦은 것을 사전에 범인이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주변 인물에 의한 납치 사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어쩐지 납치 과정의 개연성이나 동기가 석연치 않다”고 의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과연 H 사 사장 납치극 뒤에는 어떤 내막이 있는 걸까.
감명국 기자 kmg@ilyo.co.kr










